검은 머리카락은 항상 물에 젖어 있지만 차가운 냉기만 느껴질 뿐 사람의 것처럼 하늘하늘하게 손에 빗기지 않는다. 녹색 눈은 물에 잠겨서 볼 때면 더욱 선명하고 미소 짓는 부드러운 입술 안으로 숨겨진 날카로운 이는 상어의 것보다 단단하다. 섀넌은 인어들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개체였다. 바다의 것들이 심해로 갈수록 미적인 무언가로부터 멀어지는 것과 다르게 섀넌은 검푸른 비늘이 그 얼굴을 절반 이상 감싸고 있을 때조차 같은 인어들조차 입맛을 다실 만큼 예쁘장했다. 그는 자신의 아름다운 얼굴이 얼마나 인간들에게 잘 먹히는지 알고 있었고 처연한 표정, 눈웃음 몇 번이면 먹이가 바다로 걸어 들어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다는 것도 자연스럽게 깨우쳤다. 그는 그 해역 일대의 가장 잔인한 포식자 중 한 명이었다. 배가 고프지 않아도 흥미로 인간을 유인해 뜯어 먹고 시체는 보란 듯이 해변가에 버렸다. 인간들은 그를 증오했고 괴물이라고 소리치면서 사냥하려고 달려들다가도 섀넌이 그 우아한 지느러미를 숨기고 달빛 아래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 청년처럼 굴면 바보같이 자신이 증오하던 괴물을 믿곤 했다. 섀넌은 슬슬 그런 어리석음에 싫증이 났다. 그러니까, 인어의 삶은 너무 길고 재미가 없었다. 인간은 다 거기서 거기의 맛을 냈고 다른 인어들은 유독 성질이 포악한 섀넌과 가까이 어울리려고 하지 않았다. 재미없어. 섀넌은 몇 달 지나지 않아 많은 인어들이 그러하듯이 자신도 태양을 향해 떠올라 배를 까뒤집고 추악하게 말라 죽어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반쯤 불사의 몸인 인어들이 그 개체 수를 조절하기 위해서, 또는 기나긴 삶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곧잘 행하는 자살 방식이었다.
<소년은 불행히도>
높은 암초는 파도에 깎여 울퉁불퉁하긴 했지만 섀넌이 가장 오래 기대 있는 장소들 중 하나였다. 그는 천성적으로 게으른 자였고, 흥미가 생기지 않으면 배를 곯을지언정 식사도 잘 하지 않았다. 이렇게 뭍 근처에 몸을 뉘이고 있으면 바보같은 취객들이나 바다가 자신을 안전하게 삼켜줄 거라고 믿는 머저리들이 제 발로 걸어 들어오니 섀넌은 마냥 기다리기만 했다. 해가 뜨고 지는 것이 그에게는 하루도 아니었다. 어리고 약해 보이는, 자기보다 한참 작은 어린 소년이 바닷가를 향해서 뛰어 들어올 때도 섀넌은 거의 뜬 눈으로 졸고 있었다. 어린 몸이 바다 안으로 곤두박질 쳐 흰 포말이 요란하게 올라왔을 때야 알음알음 정신을 차린 섀넌은 물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하는 어린 소년을 무감정하게 내려다 보았다. 저건 먹을 것도 없겠군. 첫 감상은 딱 그 정도였다. 술에 취한 바보 멍청이들보다 맛 없게 생겼는 걸. 그러다가 물방울처럼 소년의 숨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오기 시작했을 때, 섀넌은 그 특유의 변덕스러움으로 바닷속에 몸을 파묻었다. 죽어가는 소년을 살린 것은 호의나 선의가 아니라 유난하고 즉흥적인 인어의 성미 탓이었다. 섀넌은 물을 너무 많이 먹어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소년의 가슴을 억센 힘으로 내리눌렀다. 폐가 갈빗대에 눌리면서 울컥 물을 뱉은 소년이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한 채 섀넌을 보고 누구냐고 물었다. 섀넌은 소년의 과거사나 왜 바다에 빠져야 했는지 따위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으므로 얼굴을 감싸고 있던 비늘을 걷어내며 모두가 아름답다 찬양했던 얼굴로 지금까지 잡아먹었던 인간들처럼 자연스럽게 웃어보였다. 난 천사야. 섀넌은 인간들이 자기한테 죽기 전에 곧잘 찾던 존재를 하나 더 떠올렸다. 아니면 신이거나.
섀넌은 자신이 구한 소년의 이름이 한셀 베이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셀은 다른 인간들과 다르게 제법 맛있는 냄새를 풍겼다. 맛없게 생겨서 놓쳤더라면 인어의 삶 중 한 30년은 후회했을 것이 분명했다. 섀넌은 한셀이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이유가 어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어린아이들은 항상 가장 미식의 존재에 가까우니까. 그렇지만 양이 너무 적었다. 섀넌은 인간이 다 자라는 데 얼마나 걸리는지 한셀에게 질문했다. 한셀은 자신이 몇 년 지나지 않아 성인이 될 것이라고 했고 섀넌은 딱 그때까지만 제가 구한 인간을 데리고 놀기로 했다. 인간의 삶은 어차피 인어에게 별 것도 아닌 기간이었다. 가축을 기르거나 애완동물을 하나 데리고 오듯이 섀넌은 자신을 기꺼이 찾아 위험한 바다에 발을 들이는 이 어린 짐승이 자신을 길들이도록 놔두었다. 그리곤 곧잘 반복해서 한셀에게 속삭였다. 난 네 신이야. 그러니 언제나 날 보러 와야 해. 약속할 수 있지? 인간들은 다 이렇게 약속을 한다며……. 새끼 손가락을 걸었을 때 한셀은 허무맹랑한 소리를 지껄이는 이 아름답고 터무니없이 무책임한 바다 괴물을 한참 바라보더니, 곧 정말 바보 멍청이라도 된 것처럼 우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섀넌은 즐겁게 웃으며 한셀을 위해 값비싼 진주들을 선물해 주었다. 자, 이제 전부 네 거야. 날 만나러 온다는 건 이런 일이야. 인간들은 이런 걸 좋아하잖아. 섀넌은 한셀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인간의 세월은 인어에게 찰나라서, 순식간에 소년은 청년으로 자랐다. 자기보다 훨씬 작던 한셀이 어느덧 자신과 눈높이가 맞기 시작하는데도 섀넌은 언제나 같은 얼굴로, 성장이나 노화 따위는 없는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암초에 기대 늘 같은 태도로 한셀을 맞이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셀은 섀넌을 찾아왔다. 섀넌은 한셀이 자기가 아는 인간 중에 – 물론 섀넌이 아는 인간들은 대개 죽은 인간들뿐이었지만 – 가장 약속을 잘 지킨다고 생각했다.
사건은 단순했다. 섀넌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한셀이 올 시간이라는 걸 알았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술에 취해 바다로 뛰어 들어오는 멍청이들은 경고 표지판이 있으나 없으나 매해 있었고 이 구역 얕은 바다에서 죽을 짓을 하는 머저리들의 최후는 인어들 중에서도 가장 포악한 섀넌의 손에 의해 결정되었다. 한셀은 섀넌이 입가에 잔뜩 피를 묻히고 살점을 날카로운 이로 씹어대고 있을 즈음에 평소와 다름 없이 찾아왔다. 섀넌은 인간이 인간을 먹는다는 것을 구역질 나 한다는 걸, 그리고 한셀 같은 무던한 인간이라도 겁을 낼 줄 안다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다. 다시 말하지만 섀넌이 아는 인간들이란 그 전까지 그저 죽은 인간들, 아니면 죽기 직전에 도망친 인간들뿐이었으며 한셀은 섀넌이 알고 있는 유일하게 ‘살아있는’ 인간이었다. 그러니 섀넌은 팔꿈치가 엉망으로 돌아가 잘린 팔을 다시 바다로 던져 넣고는 자신에게서 도망친 한셀을 보고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이제 죽일까?
<인어를 위한 테이블>
한셀은 며칠간 바다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건 어쩌면 다행이었고 또 어쩔 때는 불행이었다. 섀넌은 언제나와 같이 높은 암초에 몸을 기대고 한셀을 기다렸다. 하루를 기다렸을 때는 한셀을 찢어 죽일 것이라고 다짐했고, 이틀째가 되니 목만 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흘이 지나자 섀넌은 그냥 한셀을 용서했다. 나흘이 지났을 때는 다시 열이 받아서 죽이기로 했다. 그리고 닷새. 섀넌은 한셀이 오지 않는 것이 서운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래서 그깟 인간 따위 그냥 육지로 잠시 걸어나가 잡아 먹고 오라는 다른 인어의 얼굴을 할퀴었다. 잔뜩 싸우고 뭍 위로 올라와 암초에 털을 기댔을 때, 얼굴 위로 돋은 비늘을 다 숨기지도 못했는데 저 멀리서 한셀이 오는 것이 보였다. 섀넌은 몸을 일으키곤 괴물치곤 우아하게 지느러미를 숨겼다. 벗은 몸을 드러내 놓고도 전혀 수치심 따위는 없는 낯으로 한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잠시 형체를 갖춘, 흉내 낸 것에 불과한 인간의 다리는 오래 걷지 못하고 결국 암초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섀넌이 한셀의 손을 움켜잡았다. 넌 약속을 어겼어. 인어와의 약속을 어긴 거야. 속삭이는 목소리는 곧잘 노래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닷새나 날 만나러 오지 않았잖아. 난 널 죽이려고 했단 말이야. 내일까지 오지 않았으면 난 널 죽였을 거라고, 알겠어? 섀넌은 한셀의 얼굴에 떠오른 막연한 공포를 읽었지만 잡은 손을 놓아주지는 않았다. 왼손 소지 한 마디. 그 정도면 닷새 만에 찾아온 한셀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 섀넌은 아주 배가 고팠고 한셀은 더 이상 어린 소년이 아닌 데도 늘 맛있는 향이 났다. 섀넌은 입맛을 한 번 다셨다. 가까스로 숨겼던 얼굴 위의 비늘이 다시 푸르게 돋아났다. 욕망을 감추지 못한 녹색 눈은 물에 잠겨서 올려다 볼 때처럼 선명했다. 상어 이빨과 엇비슷하게 단단한 날카로운 치아를 벌리고 그 사이로 도망치지 않는 먹잇감을 가둔다. 손가락 끝마디가 이로 잘리는 감각이 생경할 텐데도 한셀은 크게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피 묻은 입가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섀넌은 잔뜩 흥분해서 한셀을 향해 팔을 뻗었다. 네가 다음에 약속을 어기면 난 널 정말 죽여 버릴 거야. 나는 네 신이잖아, 내가 널 구했잖아? 그러면 우리는 서로를 책임져야 해. 신은 그런 거라고 인간들이 그랬단 말이야. 죽기 전에, 라는 말은 구태여 뱉지 않고 섀넌은 입맛만 다셨다. 더 먹고 싶었다. 한셀은 정말 맛있었다. 팔을 둘러 서늘하기 짝이 없는 냉혈 동물의 체온으로 갑작스러운 고통 때문에 열이 오른 인간의 몸을 꼭 껴안으며 섀넌이 세뇌하듯 중얼거리는 말에 한셀이 신음도 뱉지 못하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섀넌은 끓어오르는 식욕을 내리 누르곤 안겨 있는 것처럼 팔로 한셀을 옭아매 붙들었다. 열이 오른, 결함이 생긴 인간의 품은 꼭 태양처럼 따뜻했다. 섀넌은 왜 인어들이 태양을 향해 배를 까뒤집고 죽어버리는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인어를 위한 테이블은 정교하게, 그리고 서로를 파괴하는 형식으로 세팅 되었다. 그 누구도 식사를 마치지 못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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