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오의 페르세포네
  • 2021. 6. 11.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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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짓무른 과육이 거친 손끝을 타고 흐른다. 석류만큼 성가신 과일이 또 있을까? 배 불릴 양도 안 되는 자그마한 석류 알갱이들이 입속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손가락 사이 틈을 비집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란테는 이럴 때마다 자신이 무슨 데메테르의 금지옥엽 외동딸이라도 된 기분에 휩싸였다. 명계의 음식은 절대 입에 대지 말라던 경고를 무시하고 꼬임에 속아 넘어가 석류알을 삼킨 그 불행한 저승의 여왕. 손에 끈적하게 남은 과즙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란테가 짧게 입맛을 다셨다. 그는 항상 페르세포네가 아니라 그녀를 잃은 쪽이 더 불행하다고 생각해 왔다.

     

    정오의 페르세포네

     

    자의적 타살은 자살이다.

    아누비스는 곧잘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건 명백한 비난이었다. 란테는 그 말이 나올 때면 모르는 척 눈썹 끝을 찡그리며 창아, 우리 1시간하고도 19분 남았어, 하고 말을 흘렸다. 이 주제로 넘어가 봐야 란테에게 유리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에서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을 만큼 의학적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종종 살아있는 사람을 관 속에 가둔 채 지하 6피트 아래에 묻곤 했다. 생매장을 당하고도 질기게 숨이 붙어있던 인간들 중 하나가 맨손으로 젖은 땅을 파내고 무덤가에서 기어 올라온 것이 - 신빙성은 없지만 - 어쩌면 좀비나 구울 같은 종류의 크리처들에게 존재적 기초를 다져주었을 것이다. 란테는 한 번 관에 담긴 채 땅에 묻혔다. 그의 생환은 좀비나 구울의 탄생보다는 위생적이고 대단한 육체적 노동이 필요하지 않았으며 말끔한 외양을 유지한 채 이루어졌는데, 대신 이런 조건이 붙었다: 하루에 8시간만 살아있는 상태.

    하루가 24시간이라고 정의했을 때 3분의 1을 시체가 아니라 산 사람으로 살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페르세포네스러운 부분이라고 란테는 농담처럼 지껄였다. 절반도 아니고 딱 3분의 1이라니, 매력적이지 않아? 아누비스는 란테가 무슨 말이라도 하면 열이 오른 표정으로 그냥 닥쳐, 하고 면박을 주었지만 란테가 정말 닥치면 자기도 말을 잃었다. 란테는 그 사실을 알아서 그냥 계속 떠들었다. 자기야, 너 이집트 말고 그리스 신은 어때? 아누비스나 하데스나 거기서 거기잖아. 중등 교육 과정도 제대로 이수하지 못한 란테는 신화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편도 아니었다. 다음 코드네임은 하데스와 페르세포네 하자. 란테는 아누비스가 이미 히트맨을 그만두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은 죽었으니 제명된 지 오래일 게 뻔했고.

     

    란테는 자살했다. 아누비스의 의견에 따르자면 이 명제는 정답이다. 그러나 란테의 시각에 입각해서 말해보자면 저 명제는 거짓이다. 란테는 자신이 죽을 줄 알았고 죽을 만한 곳에 스스로 뛰어 들어가서 비참하게 생존하는 대신 장렬하게 인생의 종막을 맞이한 것이다. 초라해서 멋진 끝이었다. 파양을 세 번이나 당하고 조직에 들어가서 온갖 나쁜 짓과 사기, 폭력, 살인 전과를 두른 인간에게 행복하고 안정적인 말미가 주어진다면 세상은 너무 불공평한 곳일 테니까. 그는 자신의 세상을 공평하게 만든 다음 거기에 아누비스를 버렸다. 한 번 배신해 본 상대를 또 감언이설로 속여 살게 만드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생각한 덕이었다.

    결말까지는 잘 갔는데 에필로그가 최악이었다. 싱크대에서 손을 씻으며 란테는 식탁에 앉아 늦은 저녁 식사를 하고 있는 아누비스를 흘긋 돌아보았다. 시간은 막 오후 7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정오에 란테가 다시 살아났으니 남은 시간은 이제 1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점심을 함께 먹었고 서로 물어뜯어 죽일 것처럼 말싸움을 두 시간 정도 한 다음 화해는 하다가 만 채로 붙어 앉아 지루한 최신 개봉 로맨스 영화 DVD를 봤다. 영화는 2시간 20분짜리였다. 그다음 이제는 거의 아누비스 혼자만 쓰는 침실의 더블베드 위에서 강박적이라고 할 만큼 엉겨 붙었다. 살과 살을 섞는 것만큼 사람에게 살아있다는 착각을 심어줄 수 있는 행위는 흔치 않기 때문이었다. 다 먹지 못한 석류 알갱이들이 모두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처박혔다. 너무 셔. 시간이 흐를수록 기분이 저조해 보이는 아누비스를 향해 부러 젖은 손을 털어 물을 튀기는 시답잖은 장난질을 해대며 란테가 웃었다. 이제16시간 뒤에 보자. 정각 8시를 알리는 시계 초침 소리와 함께 란테는 또 아누비스의 앞에서 죽는다. 이 죽음은 피할 수 없다. 16시간 뒤의 생환이 란테의 의지가 아닌 것처럼.

     

    죽는 것보다 다시 살아나는 게 더 좆같다고 하면 믿어져? 다음 날 정오가 됐을 때 란테는 긴 잠에서 깨어난 숲속의 공주처럼 산뜻하게 기지개를 켜며 아누비스의 기분을 좆같게 만드는 소리를 잘도 지껄였다. 그럼 영원히 뒤지시든지. 그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아서 란테는 제 몫의 관 대용으로 - 집 안에 관을 미리 들여놓자고 했을 때 두 사람은 또 서로를 죽일 것처럼 싸웠다. - 놓인 싱글 베드를 정리했다. 너 나한테 또 이불 덮어줬구나. 시체일 때는 덮어 줄 필요 없다니까. 아누비스의 눈썹 끝이 란테의 말과 동시에 확 일그러졌다. 죽은 사람의 몸은 생각보다 너무 차갑고 또 쉽게 부패해 버려서, 그리고 작은 충격에도 피부가 쉽게 짓무르는 탓에 아누비스는 적어도 16시간 동안은 란테에게 쉽게 접근하지 못했다. 죽은 사람은 꽉 끌어안는 것만으로도 피부에 멍이 들고 장기가 쏟아졌다. 다음 날 정오면 그 시체는 말도 못하게 멀끔한 꼴로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16시간 동안 아누비스는 란테의 시신이 부패하는 과정을 봐야만 했다.

    아누비스는 악착같이 살았다. 란테는 옆에서 악착같이 사는 아누비스한테 야, 너무 그렇게 힘내지 마, 라고 시비나 걸다가 예고도 한 번 없이 덜컥 뒤졌다. 아누비스는 책임에 있어서 항상 제 몫을 하는 사람이었고 란테는 자기 책임도 남한테 떠넘기는 족속이었다. 사실 죽인 사람 수로 치면 아누비스가 훨씬 많을 텐데 란테 쪽이 킬 수도 딸리면서 더 나쁜 새끼처럼 보이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는 별로 삶에 의지와 의욕이 없었다. 인생이 재미없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재밌지도 않아서 문제였다. 란테는 그래서 죽었다. 어차피 죽을 인생이라면 좀 간지나게 죽어보려고 부나방처럼 살다가. 란테는 죽고 나서야 자신의 사망에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는데 이것은 잔머리를 제외하곤 깨우치는 학습 머리가 나쁜 그의 오래된 문제 중 하나였다. 엎질러지고 나서야 그게 물병인 줄 아는 거. 생각해 보니 제 목숨은 한 명 값이 아니라 두 명의 몫을 저당 잡고 있던 것이다. 그걸 뒤지고 나서야 깨달았다는 점에서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쁜 새끼기는 했다.

     

    두 사람은 속된 말로, 존나게 악연이었다. 둘 다 성질머리가 안 좋은데 처음 만난 곳도 무리도 터가 안 좋아서 더 그랬다. 그래도 원래 악연 속에서 피는 사랑이 진흙탕 속 연꽃처럼 아름다운 법이라 몸 한 번 맞고 마음도 두어 번 맞고 나니 사귀게 됐다. '사귀게 됐다' 부분에서 악연은 다시 존나게 피크를 찍었다. 란테는 처음 살아 돌아왔을 때 자기야, 화장을 했어야지 매장을 하면 어떡해, 같은 대사를 쳤다가 총격으로 인해 3시간 만에 다시 사망할 뻔했다.

    아누비스는 죽은 사람을 살리는 주문이나 금지된 제사, 사교도의 술식 같은 것엔 관심도 없었고 지식 역시 없었지만 자신의 좆같은 기분이 대강 우주의 섭리 어쩌고에 관여하는 원한과 유사하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란테를 다시 살릴 노력은 딱히 안 했지만 히트맨 일을 그만두고 멍하니 있는 자유 우울 시간 동안 아누비스는 한 2천 번 정도, 아니면 한 2억 번 정도 란테를 다시 살린 다음 자기 손으로 죽여 버리는 상상을 했다. 우주의 신은 그런 아누비스를 가련하게 여겨서, 어쩌면 아누비스에게 란테를 후드려 팰 기회를 주려고, 그도 아니면 종막을 맞이한 한심한 인간의 삶이 얼척이 없어서 란테의 끝에 한정 에필로그를 선사했다. 란테는 이 에필로그를 정말이지 좆같다고 평했다. 죽었다 살아나는 것도 노동이야. 제 죽음과 생환에 대해서 란테는 늘 반쯤 농담을 했다.

     

    창아. 죽음이 47분 남은 시점에 란테는 소파에 길게 누운 채로 아누비스를 불렀다. 아누비스는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저러나, 하는 낯으로 란테를 돌아봤다. 좀비처럼 죽었다 살아났다 다시 죽기를 반복하는 애인에게 익숙해진다는 것은 비극인가, 희극인가. 란테나 아누비스나 닳을 대로 닳은 인간들이어서, 두 사람은 딱히 해피엔딩을 믿는 편이 아니었다. 이미 죽은 사람이 8시간 동안 살아나는 기현상이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는 막연한 낙관적임도, 또는 이러다 정말 온전한 삶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종교에 가까운 믿음도 두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란테는 이 밤이 자신의 진정한 마지막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시계의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건 경고였다. 이제는 정말 떠나야 할 때라는 경고. 그는 타고나길 배신자였으므로 눈치 빠른 애인이 페르세포네의 결말을 알아차리기 전에 선수를 쳤다. 내일은 좀 밖에 나가자. 우리 매번 안에서만 뒹굴잖아. 나 이 앞에서 파는 프로즌 요거트 먹고 싶어. 젤리 토핑 뿌릴래. 아누비스는 그 말을 듣다가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거기 저번 달에 망했어, 멍청아. 란테의 입에서 작게 욕설이 흘러나왔다. 뭐 이 근방 가게는 세 달에 한 번은 망해. 됐어. 그럼 너 나랑 내일 혼인 신고 하러 가자. 프로즌 요거트에서 혼인 신고로 단계가 개연성 없이 펄쩍 뛰었는데도 아누비스는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지랄 마. 완전한 죽음까지는 이제 30분도 더 남지 않았다. 란테는 일부러 슬픈 표정을 지으며 아잉, , 하고 3할 정도만 먹히는 애교를 부렸다. 아누비스가 란테의 이마를 가볍게 툭 밀어냈다. 이 새끼, 너 꿍꿍이가 뭐야.

     

    꿍꿍이라니. 자기야, 나 섭섭해.

    뒤진다. 너 뭐 잘못했어.

    . 나랑 결혼하기 싫어? 나 서문 선우할래. 나도 성씨 좀 가져 보자.

    지랄 마라, 진짜.

     

    두서없는 말다툼이 길게 이어졌다. 그래. 우린 결혼하자마자 이혼할 것 같긴 해. 혼자서 말하고 혼자서 납득한 란테가 웃길 것도 없는데 아하하,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곤 죽음보다 더 밀도가 높은 정적. 란테는 속으로 욕만 뱉었다. 프로즌 요거트 가게가 망한 것보다 상황이 나빴다. 어떻게 해도 눈치 빠른 애인을 완전히 속이는 건 불가능했다. 특히나 아누비스는 란테에 대해서 만큼은 신뢰가 0에 수렴했으니 란테가 숨만 쉬어도 의심스러워할 게 뻔했다. 아누비스와 란테는 서로 같이 지낸 시간이 너무 길어서 서로에 대해서 좀 쓸데없이 알아차리는 게 빨랐다. 이제 9. 시계를 곁눈질로 확인한 란테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싱글 베드를 향해 걸어갔다. 저 침대는 이제 정말 관이 될 것이다. 페르세포네 놀이는 끝을 맞이할 것이고. 요거트는 물론이고 혼인 신고서 작성도 존재할 수 없는 미래다. 창아. 란테가 조르듯이 아누비스를 불렀다. 아누비스는 왜, 라거나 또 뭐, 따위의 응수도 하지 않았다. 직감은 전염되는 질병이던가? 란테는 짧게 입맛을 다셨다. 석류는 다 먹지도 않았는데.

     

    이제 나 좀 그만 용서해 주면 안 돼?

     

    5. 아누비스는 여전히 말이 없다. 란테는 침대 위에 누웠다. 시체한테는 덮지 말라고 하면서 치우지 못한 이불을 스스로 덮었다. 마지막 아양인 셈이다. 아누비스는 그 꼴을 가만히, 눈매를 좁히며 사냥감을 확인할 때처럼 신중하게 바라보다가 8시 정각이 되기 30초 전에야 대답한다. 닥쳐. 방금 건 정말 자살 같잖아, 새끼야. 란테는 결국 웃으면서 눈을 감는다. 아누비스가 우는 건지 아니면 울지 않는 건지, 도통 알아차리기 어렵다고 생각하면서. 정오의 페르세포네가 영원한 지하를 향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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