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이 말했다. 준희야, 너 사학과 나와서 뭐 먹고 살려고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교직 이수를 해라. 거기에다 대고 저기요 사학과 교수님이 사학과 학생한테 그런 말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하고 반박할 용기가 한준희에게 개미 눈물 만큼도 없었기에 준희는 제자의 진로를 생각해주는 사려 깊은 교수님 앞에서 그러마, 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니 무슨 42학점을 더 들어야 하는 교직 이수 얘기를 3학년 1학기에 해 주냐고. 작년부터 하라고 하든가.

 

서울에 있는 대학 갔다고 동네에 현수막까지 걸고 자랑이란 자랑은 온 동네방네 다 해쳐먹었던 준희의 부모님은 아들이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고 군대까지 육군으로 무사히 다녀와 제대하자 입시 때와 엇비슷하게 앞으로의 취업 전망에 대해 주기적으로 질문하곤 했다. 사실 이런 질문을 받게 된 것은 한준희의 과실도 2할 정도는 있었다. 준희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선을 넘어본 적 없는 모범생으로 살았고 간은 콩알만 한데다가 작은 일에도 쉽게 놀라는 새가슴이었기 때문에 남들 다 썩인다는 부모 속을 양아치스러운 방법으로는 썩여 본 적이 없었다. 다만 지나치게 모범적인 방식으로는 제법 부모님 마음에 훈연질을 할 줄 알았는데, 한준희는 가만히 두면 정말 인생에 실용적인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오죽하면 준희의 모친은 종종 제 배 열 달 아파 낳은 아들내미를 보고 시대를 잘못 태어난 조선시대 선비라며 혀를 차곤 했다. 장원 급제가 없는 21세기니 그거랑 비슷한 공무원 시험이라도 보라고 아들을 못살게 굴어 봤지만 돌아오는 답이라곤 수학 공부하기 싫어서 그건 곧 죽어도 못하겠다는 고집밖에는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철없는 사내자식들처럼 여자 친구나 만들고 끼고 돌았으면 엄마 입장에서 조금 서운하기는 해도 예비 며느리를 손에 쥐고 여럿 재보는 재미라도 있었으련만 한준희는 여자에도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 멀끔한 페이스며 182cm라는 키, 거기에 성실한 성격까지 신입생으로 들어오자마자 저 놈이 품절되기 전에 내가 품절 시켜야 한다, 하고 덤빈 세상 물정에 밝은 여성들이 2호선 막차 타려고 줄 선 사람들마냥 바글거렸지만 한준희는 연애를 하기엔 너무나 눈치가 없었다. 얼굴도 성격도 착한데 정신머리가 나빴다. 매난국죽 선비 타령이나 어울리지 기생 끼고 풍류를 즐기기엔 지독한 쑥맥이었다. 결국 한준희는 대학원 갈 것도 아니면서 제대하고 복학한 뒤에도 진짜 개 미친 새끼처럼 노는 자리 한 번 안 나가고 공부만 했다. 그 꼴을 오래 지켜보던 사학과 교수가 준희를 불렀다. 준희야, 쿠바 미사일 위기가 몇 년이라고? 세계사 연도를 기막히게 외우는 한준희가 대답했다. 1962년이요. 교수가 물었다. 너 석박사 밟을 거니? 준희는 교수의 입에서 석박사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희게 질려 아니요, 하고 그 치고는 드물게 단호한 어조로 답했다. 그러고 나자 교수는 준희에게 엄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교직 이수해라. 너 이러다 굶어 죽는다, 라는 말을 전공 교수한테 직접 듣는 기분이 퍽 다이나믹했지만 준희는 그냥 그러마, 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석박사보다는 같은 사 자라도 돈 내는 게 아니라 버는 교사가 나았으니까.

 

<서양 미술사의 이해>

 

에휴. 다음 학기는 전부 교직 과목으로만 수강해야 겠네. 그렇게 한숨을 쉬며 준희는 지난 수강신청 기간에 운 좋게 누가 버린 걸 주워다 먹은 인기 교양 강의를 듣기 위해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꿀 강의는 괜히 꿀 강의가 아닌지 서양 미술사의 이해는 중간중간 영화도 보여주고 중간고사 기말고사도 보지 않는 쿨한 수업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미국에서 석박사를 밟고 오셨다는 해당 수업의 교수님은 겉멋을 중시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유일하게 제출해야 하는 기말 레포트도 야부리만 잘 털면 중간 이상은 준다고 했다. 대형 강의실의 제일 뒷자리는 벌써 어떻게든 교수와 최대한 거리를 두려는 학생들로 가득차 있었다. 결국 준희는 마지 못해 맨 뒷자리에서 두 칸이나 떨어진 중간 자리쯤에 제 가방을 올려두었다. 옆자리에 누가 앉는 것 같았지만 크게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제 동기들 중에서는 이 꿀 강의를 잡은 행운아가 한 명도 없었던 탓이었다. 어차피 모르는 타과생이 제 옆에 앉는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한준희는 교재 대용으로 프린트 해 온 PPT를 가방을 뒤져 꺼내 놓았다. 그러자 옆에 앉은 학생이 그에게 대뜸 말을 걸어오는 게 아닌가? 저기요. 저랑 PPT 좀 같이 보면 안 될까요. 제가 오늘 프린트를 못 해서요. 한준희는 이 타학과 학생의 말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눈치가 약에 쓸래도 없는 인간이더라도 바로 옆자리에 앉은 학생이 급하게 자기 PPT 프린트물을 구겨 가방으로 주워 넣는 것을 두 눈이 달린 이상 못 볼 수는 없었던 탓이다. 준희는 이 싸이코는 뭐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유교 보이답게 이것이 저 타과생의 플러팅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 근데 제가 종이 아끼려고 4슬라이드를 1페이지에 프린트 해서요. 글자 작아서 보기 힘드실 수도 있어요. 완곡하게 너 나무한테 미안하지도 않니? 네 거 다시 꺼내서 봐라, 하고 말을 얹었지만 타과생은 끄덕도 하지 않고 그럼 좀 더 가까이 붙어서 봐야겠네요, 하고 말았다. 한준희는 깊이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공부하기를 제외하고 캠퍼스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황당한 일이 자신에게 감당이 안 된다고 판단한 탓이었다.

수업이 다 끝나고 나니 그 타과생이 준희에게 프린트물을 함께 봐 주어서 고맙다고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자기 소개를 하며 친한 척 말을 걸어왔다. 다음 강의라도 있었더라면 뭐지? 저 바빠요, 하고 자리를 황급히 떴을 텐데 정말로 다음 강의도 아르바이트도 약속도 없었던 준희는 제게 이 은혜를 갚기 위해 다음에 밥을 사겠다며 연락처 공유를 원하는 초특급 인싸를 - 사학과에서는 만난 적 없는 스타일이었다. - 떨쳐낼 수가 없었다. 일단 이 인싸의 얼굴이 너무 미남이었던 탓이었다. 뭐지? 이과생은 다 잘생긴 건가? 공과대학 신입생이 왜 인문대생이 바글바글한 4학년 인기 교양을 듣고 있는지도 사실 좀 궁금했지만 그런 걸 곧장 물어보기에 준희는 그다지 외향적인 인간이 아니었다. 휩쓸려서 내 이름은 한준희이며 사학과 3학년이고 내 번호는 010, 하고 줄줄 개인 정보를 늘어놓던 준희는 곧 자신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 인싸에게 반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 어쩌다 이렇게 됐지? 준희의 얼굴에 물음표가 수시로 떠오르거나 말거나 공과대학 신입생 심은재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제가 연락하면 받아야 해요, 하고 준희와 악수인지 스킨십인지 모를 스킨십을 한 번 빠르게 끝낸 뒤 전 그럼 전공 수업 들으러 갈게요, 하고 준희의 시선 속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뭐지? 한준희는 제 핸드폰 액정 위에 남아있는 은재의 번호를 시선으로 훑었다. 연도 외우느라 숫자 만큼은 누구보다 빠르게 외우는 준희에게 있어 단순한 숫자들로 구성된 은재의 11자리 전화번호는 금방 외워지는 종류였다. 번호도 꼭, 자기 같네.

 

<형 다음 학기부터 교직 이수만 하는데>

 

은재는 주에 두 번 한 시간이 조금 넘는 강의 시간 동안 꾸준하게 준희의 옆자리에 앉았다. 준희가 맨 뒷자리에 앉든 아니면 교수님과의 아이 컨택이 되는 앞자리에 앉든 자기 지정석이라도 되는 것처럼 준희에게 붙어 앉았다. 한 번은 열정적으로 이 강의를 수강하는 모범적인 여학생 한 명이 자리가 없어 눈물을 삼키며 앞자리에 앉은 준희 옆을 차지하고 앉아 있자 웃는 얼굴로 생글생글 다가가서 얼굴에 철판 깔고 저희 일행인데 혹시 자리 좀 바꿔주시면 안 돼요? 하고 말까지 걸어 기필코 저 새끼들 뭐지? 하는 시선을 받은 다음에야 자신만의 지정석을 사수한 적도 있었다. 왜 그렇게 내 옆에 앉으려고 해? 번호 교환 이후로 종종 카톡을 나누기는 했지만 그다지 깊은 얘기를 한 것도 아닌 타과 신입생이 제게 친밀하게 구는 것이 꽤 어색하게 느껴졌던 준희가 묻자 은재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형이 좋아서요, 하고 싱겁게 상황을 넘겨 버렸다. 준희는 그런 은재의 물 흐르는 듯한 플러팅에 호칭이 선배에서 형으로 바뀐 것도 모르고 인싸들은 정말 이해할 수 없네, 라고 멍청한 생각만 머릿속에 채워 넣었다.

준희는 은재가 시간이 지날수록 불편해졌다. 새가슴이라 이 불편함을 내색도 하지 못했지만 자꾸 은재가 신경이 쓰였다. 세상 만사에 무심하고 지난 역사와 대학교 무사 졸업에만 관심이 있는 한준희가 은재가 개를 키운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데에는 일주일이 걸리지 않았고 농구를 잘 한다는 걸 알게 되는 것에는 3주도 걸리지 않았다. 솔직히 한준희는 자신이 신입생 때 사귀었던 국문과 여자친구보다 은재에 대해 더 빠르고 많이 알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어 덜컥 겁도 났다. 청소년기도 아니고 20대가 넘어서야 갑자기 성정체성에 혼란이 오는 것도 좀 곤란하지 않은가. 앞으로의 교직 이수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빠개지기 일보직전인데 교양 수업 딱 하나 겹치는 공과대학 신입생에게 마음이 끌리는 사실을 쿨 인정 하는 것은 인생을 너무 파멸의 KTX로 몰아가는 일이었다. 그래서 준희는 자신이 제일 잘 하는 모른척 하기로 모든 것을 일관했다. 준희 딴에는 꽤 애를 쓰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니 은재는 준희 인생에서 얼마 볼 일 없는 천연기념물 같은 인싸 신입생 정도로 남았고 준희는 은재의 큰 손에 시선을 두는 자신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져서 은재의 연락을 씹거나 교양 강의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마주치는 일을 슬슬 피했다. 심은재가 한준희의 그런 스탠스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렇지만 은재는 준희의 옆자리를 그렇게 독하게 사수하는 것치고는 별다르게 적극적인 제스쳐를 취하지 않았다. 마치 너 내가 이러면 도망칠 거지? 하고 간을 보고 있는 것처럼 형, 저랑 주말에 영화 볼래요? 하고 툭 말을 뱉었다가도 아, 그런데 요즘 영화 볼 거 없네, 하고 알아서 주워 담았다. 한준희는 점점 더 혼란스럽고 불편해졌다. 얜 대체 뭐지? 인싸들은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네……. 물론 한준희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저돌적이지 않은 심은재에게 서운한 자신이었다. 사내 자식이 영화표를 뽑으려고 했으면 나랑 포토 티켓은 뽑았어야지. 칼만 뽑고 무는 왜 안 써는 거냐고.

 

은재의 미적지근한 태도가 달라진 것은 준희가 다음 학기부터 교직 이수 42학점을 채우기 위해 교양 강의는 하나도 듣지 않을 거라는 말을 꺼낸 뒤부터였다. 신입생이면서 어디서 그렇게 정보를 잘 물어 오는 건지 준희는 은재 옆에 앉은 뒤로 피해야 할 과제 내기 천재 교수님 리스트를 전부 알게 되었다. 사학과 군대 제외 3년을 재학하면서 전혀 알지 못한 정보였다. 다음 학기에 이 교양 같이 들어요. 은재가 준희의 프린트물 위로 과목명을 슬금슬금 과목명을 적어 놓았을 때, 준희는 그런 은재를 꽤 귀엽다고 생각하면서도 안 돼, 하고 그 아래에 흘림체로 답을 적었다. 왜요? 이유를 묻는 목소리는 작았지만 앞뒤 학생들이 다 들을 만큼의 볼륨을 가진 육성으로 돌아왔다. 준희는 잠깐 고개를 들어 은재와 시선을 마주쳤다. 나 다음 학기부터 교직 이수해야 해서. 그 때 준희는 은재가 사냥 실패한 육식 동물 같은 표정도 지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심은재는 솔직히 한준희를 꼬시는 것에 지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같은 남자에 타과생 선배라는 것과 관계없이 자기한테 호의를 가진 것이 너무나 뚜렷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저 미친놈은 뭐지? 하는 얼굴로 저를 보던 사람이 시간이 지날수록 구워진 마시멜로 마냥 자기가 허락도 안 받고 형이라고 부르는 줄도 모르고 말랑하게 풀리는 것도 우스웠다. 은재는 자신이 신입생이고 준희가 3학년 1학기이므로 꼬실 기간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번 학기에 안 되면 다음 학기도 있기 마련이고 방학에도 온갖 핑계를 대며 카톡을 해댈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슬쩍슬쩍 도망치는 한준희를 당기기만 하는 게 아니라 밀어도 내고 풀어도 주고 하면서 자기만의 썸을 알차게 타고 그 상황을 살짝 즐기기까지 했다. 자기가 살짝만 밀어내도 눈에 띄게 시무룩해지는 그 순한 얼굴이 웃기고 귀여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뭐? 교직 이수? 이번 학기가 일반 교양 마지막? 심은재는 한준희가 자신을 배신한 것도 아닌데 기가 찼다. 형 선생님 하려고요? 강의가 끝날 즈음에 가방을 챙기는 준희를 빤히 보며 이렇게 물을 정도로. 은재의 시선에 조금 놀란 새가슴 한준희는 그 질문에 ? …… 하고 바보 같이 대답했다. 우리 교수님이 나보고 교직 이수 하라고 그래서. 이렇게 심은재는 얼굴도 모르는 인문대학 사학과 전공 교수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다. 아니 형은 그럼 교수님이 죽으라면 죽을 거예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마지막 이성으로 그런 질문은 하지 않았다. 대신 꾹 참고 미소지었다. 힘들 때 웃는 놈이야말로 일류니까.

 

중간고사 기간 이후 학생들의 심리가 붕 뜨는 기간을 이용해 서양 미술사의 이해 교수는 자신도 조금 꿀을 빨아보려고 작정했는지 오늘 수업은 미술사에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으로 대체하겠다고 선포했다. 학생들이 내적 환호를 하는 가운데 준희는 책상 아래로 제 손을 대뜸 잡아오는 은재 때문에 놀라 온몸이 굳은 채였다. 손이 작은 것이 콤플렉스라 늘어난 옷 소매로 대개 가리고 다니는 손을 굳이 옷을 다 걷어내고 깍지 껴 잡아오는 게 아무리 눈치를 국밥에 말아먹은 한준희라고 해도 친한 형과 동생 사이에서 할 일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은재야, 나 손 좀 하고 팔을 비틀어 보려고 해도 한 번 꽉 잡힌 손은 미동도 없었다. 게다가 다큐멘터리를 본다고 강의실 불을 하나 끈 탓에 살짝 어두워진 공간에서 보는 은재의 옆얼굴은 또 왜 이렇게 잘생긴 건지. 한준희는 조금 울고 싶었다. 엄마, 엄마 아들 아무래도 게이인가 봐.

수업 끝까지 손이 잡힌 채 안절부절 못하던 준희는 결국 수업이 끝나고도 제 손을 놓지 않는 은재에게 왜? 하고 물었다. 이대로 학생들이 우르르 다 빠져나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에브리 타임에 나 오늘 교양 강의에서 게이 커플 봄; 하고 게시물이 올라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득해지는 정신을 다 잡으며 준희가 손 좀 놔 줘, 하고 곤란한 표정을 짓자 은재가 웃었다. 일류만이 지을 수 있는 웃음이었다. 형도 저 좋아하죠? 한준희는 자신이 아무리 역사 덕후라고 해도 이런 식으로 1962년 일어난 쿠바 미사일 위기를 간접 체험해 보고 싶었던 건 아닌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게무슨 소리야? 발발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이 그렇게 티가 났나? 하고 스스로를 되돌아보던 준희에게 은재가 몸을 가까이 붙여 소근거렸다. 제가 형 교직 이수하는 거 따라 들을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결정해요. 하나, 심은재랑 잔다. , 심은재랑 공식적으로 썸 탄다. , 앞에 두 개 다 하고 나랑 사귄다. 한준희는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전공 교수가 불러서 너 석박사 밟은 거니? 하고 물었을 때도 이렇게 혼란하지는 않았는데 갑작스럽게 몰아치는 선택지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게다가 강의실은 슬슬 다음 수업을 위해 15분의 쉬는 시간 동안 와르르 들어온 다른 강의 수강 학생들로 채워지기 시작하는 중이었다. 에브리 타임에 무슨 말이 돌아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빨리 대답 안 하면 이제 여기서 저랑 키스하는 거예요. 은재는 준희한테 고민할 시간도 별로 주지 않았다. 준희는 떨리는 동공으로 호랑이 잡으려던 덫에 걸린 다람쥐 새끼마냥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안 되는 머리를 돌돌 굴려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점점 은재의 잘생긴 얼굴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준희는 결국 도전 골든벨 마지막 문제에서 친구들아 미안하다 보드를 드는 장학생처럼 눈을 질끈 감고 대답했다. 33. 너랑 사귄다.

 

이것이 바로 캠퍼스 커플 탄생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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