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Savage
  • 2021. 4. 3.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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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벨리타 피츠앨런의 재혼 소식에 사교계는 다시 한번 술렁거렸다. 이번이 네 번째 결혼이라죠, 아마? 상대가 여덟 살이나 어린 남자래요. 저런역시 신분을 보고 결혼하는 걸까요? 에르벳 자작가라니, 대단한 가문도 아니잖아요? 예술 사업을 하고 있으니 돈은 좀 있겠지만. 하지만 그 에르벳 가문 중에서도 장남도 아닌 데다가 군인인 남자랑 결혼한다던데요. 그리고는 한 번 크게 웃음소리가 장내를 잠식하는 것이다. 그거 참 안 됐군요. 결혼 네 번 한 여자가 뭐, 선택지가 있을 수나 있겠어요? 이런 말들은 사교계에서는 썩 공격적인 이야기들도 아니었다. 그 아래로 무슨 짓을 하고 있든 수면 위에 고고하게 떠 있는 백조처럼 보이는 부분은 청렴해야 하는 귀족 집단들이 자기 자신을 더 고결하게 만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이란 대개 남의 인생에 먹칠을 하는 것 정도였으므로, 파티장은 무기를 들지 않는 전쟁터와 다를 바 없었다. 타겟이 되면 죽을 때까지 물어뜯기고 마는 곳이 사교계가 아니던가. 부채를 펼쳐 우아하게 입매를 가리며 눈으로 상대를 깔봐도 보이지 않는 부분으로는 웃었다 거짓말 칠 수 있는 장소. 벨리타는 벤야민이 해군이라는 직업 때문에 바다에 나가 있는 3주 동안 그런 곳들에 아무렇지 않게 얼굴을 비췄다. 짜증이 나지 않는다면 물론 거짓말일 테지만 여덟 살 어린 남편을 들이는 것으로 이 정도의 모욕을 받는 건 세 번이나 이혼한 경험이 있는 벨리타에게 드문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벤야민이 이 자리에 없어서 다행이기도 했다. 군인 생활에 익숙하고 무뚝뚝한 남자는 이런 말들을 들으면 상대가 귀부인이든 황제 폐하든 대뜸 딱딱한 얼굴로 매우 불쾌하군요, 하고 샴페인 잔을 바닥으로 던져 깨트렸을 테니까.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벨리타는 테라스로 나가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설마 정말 그러겠어, 그도 일단은 귀족인 걸.

     

    <설마가 사람 잡는다>

     

    벤야민 드 에르벳이 몬타 백작에게 결투를 신청했다는 사실은 반나절도 안 돼서 온 수도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사건은 이랬다. 3주 만에 군함에서 하선한 그가 지치지도 않는지 바로 그 다음 날 제 피앙세인 벨리타를 따라 파티에 얼굴을 비추자 입이 가볍기로 소문난 몬타 백작이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는 척 하면서 벨리타에게 결혼을 네 번이나 하는 여자라든가 귀족답지 않은 천박한 행실이라는 말을 떠들어 대는 탓에 벤야민이 절반 정도 와인이 남아있던 병으로 몬타 백작의 머리를 쳐 기절 시킨 것이다. 병은 깨지고 몬타 백작은 파티장의 대리석 바닥 뒤로 넘어가 머리에 피를 흘리며 기절해 있는데 제복을 입은 젊은 대위는 곧 대령으로 특진 예정인 평온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제가 없던 3주 동안 육지의 짐승은 사람 말도 하게 되었습니까. 유감이군요.

    파티의 주최자가 기함을 하며 뛰어 나오고 몬타 백작의 호위와 파티장에 고용된 다른 기사들이 삼삼오오 모여드는 동안 벤야민은 술 한 잔 마시지 않은 똑바른 자세로 뭐가 문제인지? 같은 표정이나 지으며 워커 코 끝으로 기절한 몬타 백작의 팔이나 툭툭 걷어차고 있었다. 이게 뭐하는 짓이오, 대위! 결국 엉망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참지 못한 주최자가 벤야민을 저지하자 이를 수습하기 위해 벨리타가 나서려고 했지만 슬슬 눈에 뵈는 게 없는 젊은 군인은 품에서 누가 봐도 이상한 자수가 놓여져 있는 흰 손수건을 꺼내 몬타 백작의 얼굴 위로 툭 집어 던졌다. 방금 몬타 백작에게 결투를 신청했습니다. 저도 이제 백작이니 하극상은 아닐 테죠. 벤야민의 어조는 높낮이 없이 딱딱했고 큰 키와 체구에서 나온 위압감 때문에 주변에 삼삼오오 모인 귀족들은 말 한 마디 똑바로 꺼내지 못했다. 몬타 백작의 정치적 지위나 나이를 생각하면 보통 사람들은 모욕을 당해도 참고 넘어가기 마련이었다. 적어도 사교계에서 이런 식의 무력을 행사하고 결투를 신청할 만큼 무식하고 간단한 해결 방법을 실제로 행하는 인간은 지금까지 없었던 것이다. 말이 아니라 주먹으로 결론을 내는 새로운 피츠앨런 백작의 눈치를 살피던 귀족들이 점점 거리를 벌리더니 어느 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화제를 전환해 다른 이야기를 떠들기 시작했다. , 이번 피츠앨런 백작가는 괜히 건드리면 정말 물리적으로 피만 보겠구나. 그 파티장에서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 머저리는 유감스럽게도 기절한 몬타 백작밖에 없었다.

     

    그런 식으로 굴면 어떡해요.

    파티장에서! 다른 귀족들이 다 보는데! 벨리타는 저택으로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오랜만에 보는 남편의 옆에 앉아 여전히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벤야민의 뺨을 주물거렸다. 살집이 없고 턱 윤곽이 뚜렷해 손에 잡히는 게 얼마 없을 텐데도 벤야민이 뭐라고 대꾸하지 못하게 한참을 주물거리며 사교계에서 그런 폭력을 행했다간 법원에 가기 일쑤라는 잔소리를 늘어 놓던 벨리타는 곧 크게 한숨을 쉬었다. 결투라니? 누구 하나가 대놓고 무릎을 꿇어 항복하거나 죽기 전까지는 끝나지 않는 게 귀족들 사이의 명예를 건 결투였다. 몇 십 년 전에나 유효했던 전통으로 이제는 거의 암암리에 없어져 가던 파티장 결투 전통을 제 남편이 대뜸 부활 시킨 것이나 다름 없는데 당연히 머리가 아프지 않을 수가 없었다. 통쾌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이대로 몬타 백작을 죽이는 것도 곤란했고 무릎을 꿇게 만든 뒤 사죄를 받는 것도 귀족 가문으로서 꼴이 좋지 않았다. 분명 정치적으로나 사업적으로나 압박이 들어올 게 뻔했다.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전혀 모르는 남자를 보고 있자니 이걸 설명해 봤자 이해를 못하겠다 싶어 한숨을 뱉던 벨리타는 오랜만에 본 남편의 뺨을 주무르는 것을 그만두고 그대로 끌어 와 입술에 입을 맞췄다. 혼나는 줄 알고 가만히 있던 벤야민이 벨리타가 먼저 입을 맞춰 오자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팔을 뻗어 그대로 벨리타의 허리를 감싸 안아 들었다. 제 무릎 위에 아내를 앉힌 벤야민이 벨리타의 어깨 위에 제 고개를 파묻으며 제가 잘못했습니까? 하고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이미 크고 거친 손이 드레스 자락을 들춰내고 안으로 파고 들어온 상태였다. 벨리타는 허리선을 더듬어 올라가다가 이내 제 가슴을 손에 꽉 차게 쥐고 주무르는 벤야민에게 등을 기대며 앓는 소리를 냈다. 내가이런 식으로 굴면 용서해 줄 것 같죠? 벤야민은 그 질문에 대답을 하는 대신 손에 잡히는 부인의 속옷이나 아래로 끌어 내렸다. 그냥 계속 미워하세요, 부인. 제가 그만큼 더 좋아해 보겠습니다.

     

    <야만인>

     

    신청받은 결투를 거절하는 것은 명예를 더럽히는 짓이다. 그러니 몬타 백작은 자신보다 15cm는 크고 눈 하나는 바다 위에서 잃었으며 새 사냥이 취미라 총기를 썩 잘 다루는 젊은 군인과의 결투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결투가 시작하자마자 무릎을 꿇고 패배를 인정하는 것은 거절만큼이나 불명예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백작은 평민 기사들 중에서 저를 대신해 죽을 만한 대리 결투인을 골라 놓았다. 몬타 백작의 입장에서는 정말이지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어쩌다 저런 싸이코가 귀족의 탈을 쓰고 사교계에 발을 들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사교계에서 흔히 일어나는 모략, 비웃음, 수군거림에 대고 와인 병을 휘둘러 사람을 기절 시키는 야만인이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게다가 몇십 년 전에나 있던 결투 문화를 여기서 꺼내 드는 무뢰한이라니. 몬타 백작은 자신을 응시하던 그 짐승 같은 보라색 눈을 떠올리고 치를 떨었다. 그런 야만인들에게는 문명에서 파생된 정치나 사업 분야에서의 위계가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는 걸 백작도 알고 있었다. 피츠앨런이든 에르벳이든 교류를 전부 끊어 버린다고 해도 적어도 벤야민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게 뻔했다. 모욕이란 모욕은 혼자 다 받았던 벨리타가 오히려 벤야민보다 사교계의 눈치를 보는 판국이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하필이면 제가 그런 싸이코에게 걸리다니, 운도 없지. 백작은 혀를 차며 대리 결투인에게 이왕이면 그 자식을 불구로 만들어 놓으라고 소리 소리를 쳤지만 그가 생각해도 물리적으로 벤야민을 이기기는 퍽 어려운 일처럼 느껴졌다.

     

    결투는 몬타 백작의 예상대로 놀랍도록 시시하게 끝났다. 예상과 다른 반전 같은 것은 없었다. 벤야민은 결투가 시작되자마자 몬타 백작의 대리 출전인을 총으로 쏴 버렸다. 주저함이라곤 하나 없었다. 마지막 자비인지 죽이는 대신 양손을 쏴 버려 상대가 권총을 들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대리 출전인이 조금이라도 싸울 줄 아는 인간이었더라면 벤야민은 그를 죽여버렸을 테니 몬타 백작이 대리 출전인을 잘 고른 것이라면 잘 고른 것이었다. 두 손에 탄환이 박힌 충격으로 기절한 대리 출전자와 그를 싣고 나가는 의무병들, 끝을 알리는 심판의 목소리와 상관없이 벤야민은 갤러리들처럼 잔뜩 모여있는 구경꾼들 쪽을 향해 아직 네 발이나 남은 권총을 한 손으로 겨눴다. 사람들이 혼비백산하게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거나 말거나 무감한 얼굴로 몬타 백작을 겨눈 벤야민은 그의 허벅지를 향해 한 번을 더 발포했다. 날아간 탄환은 백작이 서 있던 땅을 향해 그대로 박혔다. 백작이 조금이라도 잘못 움직였다면 고간에 총알이 박혔을 수도 있는 위치였다. 수습을 위해 뛰어오는 제 둘째 형과 부인을 곁눈질로 살핀 벤야민은 그대로 심판에게 제 권총을 쥐여주며 백작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서더니 아직 화약 냄새가 남은 오른손을 악수를 청하는 것처럼 내밀었다. , 방금 건 백작도 알겠지만, 실수입니다. 누가 봐도 고의였던 것을 진지하게 실수라고 말하며 악수를 청하니 백작이 기겁해 벤야민에게서 등을 돌리고 도망친 것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사교계는 다시 한번 벨리타 피츠앨런에 대한 이야기로 시끄러워졌다. 이번에 결혼한 남자가 그렇게 야만인이라던데, 하고 누가 운을 띄우면 다른 곳에서 그 말은 남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 하라고 주의를 줬다. 왜요? 하고 물정을 모르는 이가 질문이라도 하는 날에는 귀부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부풀려진 소문에 대해 떠들었다. 그 여덟 살 어린 남편이 군인 출신이라서 그런지 모욕을 받으면 사람을 죽인다던데요. 몬타 백작이 글쎄, 피츠앨런이랑은 거래 못 하겠다고 딱 선언한 게 다 결투 때 겁을 집어먹은 탓이라고들 얘기하잖아요. 사냥이 취미라더니 총질을 그렇게 잘한다나 봐요. 총질만 잘하는 게 아니라 파티장에서 사람도 한 번 기절 시켰다면서요? 그 말까지 나오고 나면 장내는 금세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지곤 했다. 사교계에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영애들만 깔깔 웃으며 그렇게 야만인처럼 구는 귀족이 있다고요? 그거 정말 우습네요, 하고 그 말이 농담인 줄 알아 속없이 웃을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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