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시작
새가 모두 떠난 자리에서 이도연은 담뱃재가 유골처럼 남은 유리 재떨이 하나를 찾아냈다. 그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비흡연자였고 앞으로도 담배를 피울 생각이 없었다. 차가운 겨울바람 때문에 재떨이를 쥔 두 손끝이 붉게 물들었다.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봄이면 언제 시들었냐는 듯이 새로이 움트는 화원의 생들처럼 이도연은 다시 과거로 돌아왔다. 모든 것을 잃고 이름뿐인 왕의 자리를 잃기 직전의 겨울, 그 성장통의 순간으로.
01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
제 화원에서 담배를 피우셨죠. 무던한 목소리로 이도연은 장백경을 마주했다. 이전의 삶에서 그는 이 시점에 백경의 앞에서 권총 자살을 선택했다. 열여덟 살의 생이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어도 불쑥 극단적인 구석이 터져 나오곤 해서, 이도연은 끝을 기다리지 못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단번에 죽지 못했으므로 그는 죽음의 고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무덤덤한 천성이 아니었다면 미쳐버린다고 해도 놀랍지 않을 수준의 충격이었다. 보여 주기식으로 작은 여행용 트렁크에 입지도 않을 옷가지를 밀어 넣던 장백경이 도연을 돌아보았다. 차갑고 아름다운 얼굴. 이도연은 그 얼굴을 한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여자를 사랑했다. 자신이 절대 되지 못할 종류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백경이 제 정원을 짓밟더라도 그녀가 그 정원에 발 디뎌준다는 사실에 도연은 감사할 줄 알았다. 구질구질하고 불행한 감정의 잔여물. 그의 사랑은 맹목적인 구석이 있었고 그건 때로 광기나 질병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열두 살이나 많은 사람을 이성적으로 사랑한다는 것이 정상적인 감정일 리는 없으니까. 도연은 자신이 이용당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장백경을 밀어내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 맞을 테였다. 모든 걸 잃고 나서도 원망할 수 없었으니 밀어낼 수 있다는 전제조차 성립하지 못했다. 도연은 제가 서랍에 숨겨 놓은 권총을 끝끝내 찾지 못한 장백경 앞에서 죽는 것으로 지난 생의 복수를 끝마쳤다. 도연이 의외라고 생각한 것은, 그녀가 울었기 때문이었다. 한 번도 뒤돌아 본 적 없으면서 마치 한평생을 걱정해 왔던 보호자처럼 그렇게 하지 말라고 빌었다는 사실이 도연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도연은 같은 죽음을 반복하지 않았다. 그는 대신 장백경에게 이렇게 말했다. 미국에서는… 건강하세요. 당신은 어디서든 행복하실 분이니, 연락은 하지 않겠습니다.
두 번째의 삶에서 도연은 열아홉 살이 되었다. 백경은 도연의 말대로 미국에서의 삶에 잘 적응했다. 입헌군주정은 폐지되었고 실권을 잡은 장홍현에 대한 여론이 어떻든 간에 세상은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나아갔다. 왕으로서의 특권이 없어지자 이도연은 검정고시를 치러야 했다. 그는 우수한 학생이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학업적 성취를 이뤄냈다. 대학에 가실 건가요? 그를 가르치는 개인 교사들이 그렇게 물으면 이도연은 한동안 침묵하다가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야겠죠, 그게 평범한 일일 테니까. 궤도를 잃었던 삶은 다시 불규칙적으로 하나의 세계를 이루어 가고 있었다. 첫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겪지 않아도 될 성장통 없이도 그는 매해마다 키가 자랐다. 바지 밑단은 늘 짧아졌고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얼굴과 다르게 큰 손에는 힘줄이 섰다. 원서 접수를 할 시점이 왔을 때 그는 다시 한번 제 정원으로 가 새가 떠난 자리를 확인했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렇게 간단한 것인 줄 알았더라면.
02 입 맞출 때 이가 자꾸 닿으면
이도연은 대학생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왕이었기 때문에 입시에 특혜를 받게 될 것이라고 떠들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름 있는 대학에 입학한 것은 오로지 그의 수능 성적 덕이었다. 그는 입학사정관제나 특기자 전형의 모든 수혜를 비켜 나가서는 성적만 보는 정시로 대입에 성공했다. 초등학교 졸업 이후 학교에 한 번 가보지 못한 전직 왕의 삶을 반추해 본다면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특권을 행사한 것은 여기저기 몰려드는 인터뷰 요청을 거절해야 했을 때뿐이었다. 장백경의 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잔존 세력들은 화류계와 뒷세계 여기저기에 여전히 그 뿌리를 두고 있었고, 이도연은 왕이 아닌 지금조차도, 그리고 장백경을 사랑하지 않게 된 때에도 그들의 도움을 받았다. 정상적인 삶으로 편입되었으나 그는 여전히 왕이었던 낯선 이방인일 뿐이었다. 대학 생활은 특별할 것 없이 평온하게 흘러갔지만 도연은 누구도 그를 초대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술자리에 참석할 일이 없었고 동아리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이번 세계에서도 물에 뜬 기름처럼 부유하고 있다고 느꼈다.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이도연은 성인이 된 이후 제 개인 정원의 열쇠를 윤영아에게 선물했다. 그녀는 도연이 아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 그를 가장 자연스럽게 대하는 사람이었다. 영아는 도연을 불편해하지 않았고 억지로 친해지기 위해 두세 걸음씩 성큼 다가와 어깨동무를 하지도 않았다. 전직 왕이라고 수군거리는 일도 없었다. 영아는 도연이 믿을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또래였다. 의지할 곳 없는 사람이 가냘픈 동아줄이라도 잡는 것처럼 이도연은 윤영아를 붙잡았다. 그녀는 그의 첫사랑이 아니었다. 호감으로 시작한 관계가 어떤 과정도 없이 사랑으로 발전하는 일은 드무니까. 정원의 테가 두꺼운 나무 아래에서 두 사람이 입을 맞추던 순간도 겨울이었다. 새들이 전부 날아가고 나뭇가지는 말라 바람이 불 때마다 버석한 소리가 나는 도연의 정원에서 두 사람은 처음으로 키스했다. 이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도연은 윤영아와 입을 맞추는 동안 자문했다. 자기 파괴적인 감정을 사랑이라고 믿으며 유년기를 보냈던 대다수의 청년들이 그렇듯이 이도연에게도 관계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윤영아를 사랑하는 일은 장백경의 뒤를 쫓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야 했던 지난 과거와 지나치게 다른 구석이 있었다. 한 번뿐인 짝사랑이라, 이도연은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백경과 영아를 사랑하는 제 방식이 다르다는 걸 떠올렸다. 그래서 첫 키스는 호흡이 불규칙한 채로 끝이 났고, 서로의 앞니가 자꾸 맞닿아 몇 번이고 고개를 떨어트려야 했다. 닿은 몸과 체온으로부터 누구의 것인지 모를 맥박이 느껴졌다. 심장이 이렇게 빨리 뛴다면 갑자기 멈추는 것은 아닐까. 이도연은 차갑게 식은 영아의 뺨을 제 큰 손으로 감싸 잡으며 걱정스럽게 이마와 이마를 맞대었다. 당신은 이런 나로도 괜찮은 걸까. 이 세계는 나로 괜찮은 걸까.
03 이 세계는 D의 것이 아니다
새가 다시 돌아왔다.
봄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도연은 이 새가 2주 정도만 이곳에서 보내고 다시 날아갈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한국의 사계는 길고 짧음이 확실했으니까. 사람이 가까이 다가와도 날아가지 않고 지저귀는 것을 보니 이 작은 짐승이 겁이 참 없구나 싶어 도연은 모종삽을 든 채로 그 자리에 아주 오래, 가만히 서 있었다. 새는 까맣게 막이 덮인 눈으로 도연을 바라보다가 작은 날개를 파닥이며 곧 멀리 날아가 버렸다. 그의 정원에서 그가 소유할 수 있는 것들은 대개 날아가거나 시들었다. 세계는 그에게 지나치게 많은 것을 주었지만 그것을 모두 가지도록 허락한 적이 없었다. 도연은 욕심을 내도되는지 오랫동안 망설였다. 그녀는 새가 아니고 꽃도 아닌데, 내가 욕심을 내도되는 것인지. 아니면 이 세계는, 자신은 여전히 스스로를 이방인으로 둬야만 하는지.
여행을 갈까요. 도연은 끝으로 다가온 학기말 시험 공부를 하며 제 침대에 반쯤 누워 있는 영아에게 말을 걸었다. 면허를 딸까 하는데. 영아는 반쯤 졸다 일어난 건지 한참 대답이 없다가 어디든 좋아요, 하고 대꾸했다. 마지막 프린트에 적힌 필기를 확인하던 도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여전히 졸린 눈치인 영아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1인용에 불과한 베드가 두 사람의 무게에 눌려 작게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허락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여행을 가면, 자고 와야 하는데. 시험공부는 다 했냐며 도연에게 자연스레 팔을 뻗던 영아가 그게 무슨 문제가 되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도연은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귓가만 조금 붉히며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고 말을 흐렸다.
사람들은 이 세계에 왕이 있다는 사실을 금방 잊어버렸다. 나이 든 사내들이 정치 이야기를 꺼내며 종종 과거에 대해 떠들곤 했지만 몇 년 새에 세상은 쉽게 바뀌었고 과거는 점점 가까운 어제가 되어갔다. 이도연은 자신이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열여덟 살의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곧잘 잊어버렸다. 그는 성인이 되었고 첫사랑이 아닌 상대와 첫 키스를 했으며 연인이 된 사람에게 같이 여행을 갈까요, 하고 물을 수 있는 하나의 독립된 개체였다. 왕이 아닌 이도연은, 그렇게까지 처연한 표정을 짓지도 않았다. 양친의 죽음과 직위의 상실, 몇 년 동안 이어져 온 보답 받지 못한 짝사랑은 도연의 것이 아니라 왕이었던 D의 것으로 남았다. 세계가 그에게 속삭였다. 괜찮아.
다시 겨울이 오기까지.
새가 떠난 자리에서 이도연은 쌓인 눈 위로 발자국을 만들며 이 모든 것이 어쩌면 자신의 꿈은 아닐까 의심해 보곤 했다. D의 세계 속에 여전히 갇혀 꿈을 꾸는 것은 아닌가. 자신은 이미 죽었고 이것은 억겁의 속죄 중 한 갈래뿐인 것은 아닌가. 정원의 문이 열리고 이제는 웃는 낯으로 도연씨, 하고 부르는 그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그는 항상……
이번 세계는, 이도연의 것으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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