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rom Dear, Benjamin
  • 2020. 12. 25. 20:40



  • The regret

     

    너를 디오게네스에 데려간 게 잘한 일이었을까?

    로랑은 초대장을 손에 쥔 채로 상념에 잠긴 벤야민에게 도수가 낮은 화이트 와인 한 잔을 따라 내밀었다. 넌 이런 초대에 익숙하지 않잖아. 그는 형제의 눈 한쪽을 가리고 있는 검은 안대를 응시했다. 나이 차가 얼마나지 않는 형제는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를 제외하면 서로 닮은 점이라곤 하나 없었다. 로랑은 자신이 작위도 사업도 물려받을 수 없는 삼남이라면 벤야민처럼 군에 입대하는 것이 아니라 꽤 우애 깊은 형제애를 망가트려서라도 권력을 쥐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의 안배로 욕심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려고 해도 없는 무뚝뚝한 아이가 욕심 많은 손위 형제들 다음으로 태어나서 다행이라며 에르벳 자작 부인이 혀를 내두른 게 몇 번이던가. 당장 바로 위의 누이조차 벤야민에 대해서는 이렇게 평가하곤 했다. 성격 때문에 연애 상대로도 별로고, 작위도 승계 받지 못할 군인이라는 점 때문에 결혼 상대로도 별로지만 인간적으로는 괜찮은 남자. 로랑은 벤야민이 자신보다 이르게 죽을 것 같았다. 본인의 바람처럼 대단한 전투에서 명예롭게 전사하는 것이 아니라 눈을 적출 당했을 때처럼 별 것 아닌 장소에서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졸개에게 목숨을 잃을 것 같았다. 사교 파티라면 그저 질색을 하는 동생을 비밀 유지가 되는 모임인 디오게네스 클럽으로 꼬셔 데려간 것도 그런 두려움 때문이었다. 나는 네가정착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벤야민은 자기보다 한참 작고 예쁘장하게 생긴 형의 말에 고개만 모로 기울였다. 화이트 와인은 술에 약한 벤야민을 배려한 듯 알코올 향이 적게 났고 손에 쥔 초대장은 너무 강한 힘으로 움켜쥐었던 나머지 끝부분이 구겨졌다. 비밀 유지가 되지 않는 파티에서, 파티 주최자랑 자면. 벤야민은 드물게 술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로랑의 어깨를 가볍게 붙잡았다. 제 가문에 먹칠하는 일이 될까요? 로랑은 자신보다 한참 큰 동생의 얼굴을 살폈다. 이럴 때마다 목석 같던 동생에게서 로랑은 어떤 이질감을 발견했다. 아, 그렇지. 벤야민도 에르벳이지. 그리고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인간이고. 그리고는 다시 한번 이렇게 질문했다: 너를 디오게네스에 데려간 게 잘한 일이었을까, 벤야민?

     

    The party for restart

     

    베레 백작의 저택에서 열린 파티는 선대 백작의 장례가 치러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꽤 화려해 보였다. 벤야민은 동행해주겠다며 너도 나도 관심을 보이는 형제자매들을 떼어내느라 파티가 시작되고 난 뒤에야 느지막히 저택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벤야민은 의외로 이성에게 쉽게 호감을 샀다. 과묵한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이 그 역시 사교적인 대화를 나누는 일에 익숙지 않았지만 천성적으로 타고난 다정한 성정은 어린 아가씨들이나 숫기 없는 처녀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는 정욕에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었고 작위도 사업도 물려받지 못했으니 가진 것이 없어 타인에게 강압적으로 구는 일도 없었다. 군인이기 때문에 입는 제복이 플러스 점수로 작용할 때도 있었을 것이고. 성인이 되기 전부터 여러 아가씨들로부터 구애 아닌 구애를 받은 끝에 시작한 몇 번의 연애들은 늘 썩 좋지 못한 방향으로 끝을 맺었다. 사람들은 그의 일면만 보고 헛된 것들을 기대했다. 벤야민은 살아있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군인이라는 것이 기사도 소설 속 공주님을 지키는 맹목적인 기사라는 뜻은 아니었고, 욕망이나 욕심이 적다는 표현이 잠자리에서 담백하게 군다는 의미도 아니었다. 그는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고, 친절함과 별개로 무리한 요구는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에게 기대하는 면모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게 쉽게 실망하는 상대에게 익숙해져, 헤어지자는 말에 매달리는 일 한 번 없이 수많은 관계를 정리해 왔다.

     

    그러니 검은 드레스를 입은 벨리타 피츠앨런, 또는 벨리타 드 베레의 교제 요청은 벤야민에게 그렇게 커다란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다. 당신도 언젠가 내게 지치겠지. 딱 그정도의 감상. 몸을 숙여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조금 더 마른 것 같은 여자의 허리를 팔로 감싸 안아 들며 테라스 위에 앉혀 놓았을 때, 벤야민은 벨리타가 언제쯤 자신에게 지칠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디오게네스에서 한 약속은 약속이 아니다. 잠자리에서 속삭이는 베갯머리 송사 따위는 지키지 않고 모르는 척 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익숙하지 않은 파티에 참석했고 아는 척 할 일 없어야 했을 상대와 마주보고 말을 나눴다. 벨리타는 숫기 없는 아가씨나 정숙한 처녀도 아니었다. 벤야민은 자신이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모르면서, 그 다음을 계속해서 상상했다. 언젠가 내게 지치겠지. 그 말은 스스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호흡이 곤란할 정도로 그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느릿느릿 생각을 정리하던 벤야민은 눈높이가 맞는 상대에게 팔을 뻗어 그 뺨을 감싸고 짧게 입을 맞췄다. 지치지 마세요.

     

    당신이 이 문장의 의미를 알게 된다면,

     

    The Marriage

     

    소문이 돌았다.

    베레 백작 저에서 열린 파티가 끝나고도 며칠이나 더 머무르고 간 새로운 상속녀의 손님에 대해서. 붉은 머리는 신분을 속이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눈이 하나 없다지? 그가 잃은 푸른 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그 자겠군. 에르벳 자작가 삼남.

    가십지에서는 연일 새로운 베레 백작이 될 사람으로 가진 것이 없는 해군 장교를 들먹이며 이것이 얼마나 세기의 신데렐라 스토리인지에 대해 떠들었다. 로랑은 욕망의 한 조각도 얼굴에 내비치지 않던 제 동생이 첫째 형보다도 더 유서깊은 작위를 수여받게 될 상황에 놓이자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백작 저에서 그 상속녀와 자고 오느라 늦게 들어왔노라고 어머니에게 순순히 이실직고하던 벤야민을 생각할 때마다 실소가 터져 나왔다. 어머니는 상대 여자가 이혼을 세 번이나 했다는 점을 들어 결혼을 전제로 한 교제에 대해 불만을 표했지만 모순적으로 제 아들이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해군 대위로 생을 마감하느니 결혼을 통해서라도 베레 백작이 되기를 원했다. 그야, 사내들이란 정착하고 나면 다시 떠나기 쉽지 않은 법 아니던가. 그 이유로 로랑도 벤야민이 그 여덟 살이나 많은 상속녀에게 발목이 잡히길 바랐다. 그러면 적어도 군 소속 공동묘지에 동생을 매장할 일이 없어질 테니까. 벤야민은 제게 득달같이 달려들어 벨리타에 대해 물어보는 형제자매들을 쳐내고 피곤한 낯으로 덧붙였다. 이전의 연애들처럼오래 못 갈 겁니다. 제 성정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부족한 사람이고 그녀는 어머니는 그 말에 분통을 터트렸다. , 무례한 녀석. 제대로 낳아놨더니 매번 사람을 실망 시켜서 이 나이까지 결혼도 못하는 이유가 뭐니? 이번에도 또 애먼 아가씨 눈에서 눈물 떨어지게 하면 집에서 내쫓을 줄 알아라. 로랑은 그 꼴을 보면서 결국 소리내서 크게 웃었다. 어머니, 그게 뭐 벤야민 탓인가요? 저 애는 그냥 질투가 많고 서투른 것뿐이라고요. 설마 결혼하려고 한다는 사람이 그것도 모르겠어요. 내가 보기엔 다 알 것 같은데. 로랑은 곤란한 표정으로 서 있는 벤야민을 응시하며 뒤엣말은 속으로 삼켰다. 저 자식이 저래 보여도 얼마나 집착이 심한지 모를 리가. 맹수 우리에 아무것도 모르고 머리를 밀어 넣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지치지 마세요. 벤야민은 자주 벨리타에게 그런 말을 했다. 대체로 침대 위에서였다. 거기서 하는 말들은 시간이 지나면 곧잘 없었던 일이 되고 마니까. 자신보다 여덟 살이 많은 여자는 분명 많은 남자를 침실로 끌어들여 보았을 텐데도 늘 자신을 버거워했다. 쾌감으로 벌벌 떨면서도 제 목을 껴안는 상대에게 벤야민은 애정을 느끼는 한편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시간이 지나면 벨리타는 다른 사람과 결혼할 것이고 그렇다면 자신은 귀부인의 여럿 있는 내연남들 중 한 명이 되거나 아무 사이도 아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할 때마다 기분이 상했다. 결혼을 전제로 한 교제라고 한들 그것이 이미 이별을 해 볼 대로 해 본 사람들끼리의 교제라면 무슨 맹세로 서로의 마음을 잡아둘 것인가? 자신에게 코가 꿰였노라 말하며 웃는 여자에게 벤야민은 손을 뻗어 그 입술 옆에 입을 맞췄다. 그녀는 그에게 답을 알려준다고 말했다. 그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제가 보기에 늘 뭘 모르는 것은 벨리타 쪽이었기 때문이었다.

     

    The 8th date

     

    맹수 우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사람이 있다면.

     

    손을 감싸 잡아 빈 약지에 입을 맞춘다. 입을 벌려 손끝부터 깨물고 잇자국이 난 부분은 혀를 내밀어 핥는다. 비어있나요? 되묻는 목소리는 고백받은 사람답지 않게 덤덤하다. 상대가 제 반지 호수를 언제 알아갔는지를 궁금해하면서도 들뜬 기색 없이 말을 뱉는다. 제가 당신 남편이 되면, 당신은 후회할 텐데. 겁도 없이 제게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문 자국이 선연한 약지에 반지를 끼워준다. 맹수 우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다면 이를 세우고 상대가 도망치기 전에 잡아 삼키라는 것 아닌가? 벤야민은 이제야 로랑이 한 질문을 되새긴다. 너를 디오게네스에 데려간 게 잘 한 일이었을까, 라는 물음에 그는 아니,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주위는 모두 그린 듯이 아름답고 답을 기다리는 상대의 얼굴은 퍽 사랑스럽다.

     

    그 사람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모르겠지.


    그렇다면 당신은 평생 그 우리의 문을 연 것이 실수라는 걸 몰라야만 한다.





     

     

    오너 서약서 (벨리타).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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