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초기의 목적과 달리 모두에게 손해만 남긴 채 끝을 맺었다. 종전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누구 하나가 패배를 인정하기 전까지는 싸움을 끝내지 못하는 질병을 앓았다. 휴전 협상이 전쟁보다 지지부진하게 이어진다는 것도 아이러니였다. 그레이스 올비는 외교 목적을 위해 적국에서 파견한 사신의 목이 잘려나가는 것을 아주 가까이에서 목도했다. 그는 제 뒤에 선 견습 기사들처럼 토하거나 울지는 않았지만 전쟁터에 섰을 때보다 지금이 더 역겨운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화친의 의미로각국의 왕자들이 서로의 문화를 체험하는 기회를 얻는다면 좋을 것 같군. 백치가 아닌 이상에야 그 누구도 이런 제안을 문화 교류라고 좋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레이스는 조국의 왕과 적국의 왕 모두 자식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국가의 최고 권력자가 여러 명의 애인이나 부인을 두는 것은 흠 잡을 거리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아들만 일곱 명이라고 했던가. 적국 왕의 자녀 수를 떠올리며 그레이스는 웃지 않기 위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제 나라에도 왕의 핏줄로 태어난 아이라면 썩어 넘칠 만큼 많았기 때문이었다. 목이 날아간 사신에게는 안된 일이었으나, 지난한 논의가 오가지 않아도 그레이스를 포함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어떤 자가 문화 교류라는 명목의 포로로 올지 짐작할 수 있었다. 승계 순위에서 가장 멀고, 국가를 위한 희생양으로 몰려도 반발하는 지지자 하나 없을 나약한 왕족. 그레이스 올비는 결국 왕의 접견실에서 다른 기사들과 무리 지어 나올 즈음에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어떻게 이토록 뻔할 수가.

 

01

 

잡혀왔다는 왕자는 봤어? 동료 기사 닉이 호들갑을 떨면서 물어왔을 때 그레이스는 곤란하다는 얼굴로 웃기만 했다. 그레이스 올비는 기사단 내에서 대단히 애매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귀한 집 자제가 아닌 평민 출신이었지만 대단한 가문의 후원을 받으며 어린 시절 기사단에 입단했고 나쁘지 않은 신체 조건과 준수한 외모 등으로 주변 사람들 모두가 그의 성공을 짐작했다. 개천에서 용이 탄생하는 스토리를 사람들은 진부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꽤 선호했다. 구조 속에서 위치가 역전되는 소수의 사람들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그레이스는 아직도 종종 선뜻 자신의 후견인이 되어주기로 했던 후작이 그런 목적으로 제게 접근한 것은 아닌가 되돌아보곤 했다.

그러나 그레이스 올비의 행운은 썩 오래가지 못했다. 준수했던 외모는 한 번의 출정과 함께 돌이킬 수 없는 화상 흉터를 안고 돌아왔다. 기사에게 흉터가 생기는 일이야 명예로운 법이라고들 하지만 대다수의 일반인들은 그레이스의 오른쪽 얼굴에 자리잡은 화상 흉터를 조금은 꺼림칙하게 바라보았다. 특히나 귀족 사회에서는 그의 출신 성분과 맞물려 그것을 꼭 저주 받은 것처럼 묘사했다. 승진이 뒤로 밀리기 시작한 것은 이 시점부터였고, 그레이스를 후원해주던 후작도 어느 순간부터 일정 이상의 관심을 그에게 내비치지 않았다. 기사단은 그레이스를 쫓아낼 그 어떤 구실도 가지지 못했다. 그는 적법한 후견인이 있었고 명예로운 참전자였으며 동시에 괜찮은 기사였다. 하지만 대다수의 기사들이 귀족가의 승계권 없는 아들들로 구성된다는 점을 미루어 보았을 때, 그레이스는 평민 출신 기사들과도 잘 섞이지 못하고 그렇다고 귀족 출신 기사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애매한 위치의 사람이었다. 닉은 그런 그레이스를 드물게 편하게 여기는 평민 출신 기사였다. 그는 그레이스의 얼굴 일부가 흉측하게 일그러졌기 때문에 차라리 대하기 편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레이스가 일반 기사에서 포로로 온 것이나 매한가지인 적국의 7왕자를 위한 호위 기사로 좌천 되었을 때는 누구보다 악의 없는 얼굴로 웃음을 크게 터트렸다. 일부러라니까. 내가 너 좌천될 거라고 그랬잖아. , 그래도 안됐다. 잡혀 온 게 공주님이었으면 어떻게 로맨스 시작이라도 해 보는 건데.

 

에피 알티스에 대한 그레이스 올비의 첫인상은 이것이었다: 말랐네.

딱 그정도였다. 날을 세우고 불편해 보이는, 왕자님이라는 호칭과는 전혀 거리가 있는 모양새의 빨간 머리 포로. 머리 색은 예뻤지만 눈 밑은 퀭했고 팔다리는 어디 못 먹고 다니는 가난한 평민들 마냥 비쩍 말라 있었다. 게다가 경계하는 고양이처럼 구는 태도는 어떻고. 몸을 웅크린 채로 누가 손을 대면 파드득 물러서거나 뿌리치는 에피 덕분에 연행해 온 기사들은 진땀을 빼고 있었다. 저래보여도 일국의 왕자님이시니 함부로 대할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레이스는 어서 빨리 제게로 이 골칫덩이를 넘기고 싶어 안달이 난 기사들로부터 에피의 신변을 넘겨 받으며 혹시 일반 평민을 왕자로 속여서 데려온 것은 아닌가 의심했다. 그레이스는 제 손이 큰 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성인일 사내의 어깨를 이렇게 한손으로 붙잡을 수 있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호위 기사로 따르게 된 그레이스 올비입니다. 올비 경이라고 불러주셔도 되고, 그레이스라고 지칭하셔도 됩니다. 형식적이긴 하지만 포로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제 소개를 하는 일이 그레이스에게는 그다지 모욕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에피는 제 손등에 입 맞추는 그레이스를 보더니 탁 쳐내곤 배정받은 침실로 후다닥 들어가 버렸다. 그레이스는 그것마저도 조금 왕실 훈련장 주변을 배회하는 길고양이들 같다고 생각했다. 개중에도 먹이를 좀 못 얻어먹는 어린 고양이들. 작고 귀엽지만 정을 붙이려고 들면 꼬리를 세우고 털을 부풀린 뒤 허겁지겁 도망가는, 그런 종류의.

 

02

 

 

 

 

숫기 없고 정치도 하지 못하는 어린 7왕자는 금방 왕실에서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종전이 아니라 휴전이었는데도 사람들은 언제 전쟁으로 고통받았냐는 듯이 상처를 덮어둔 채 아무렇지 않게 일상으로 돌아갔다. 사교파티는 전쟁 전만큼 자주 열리지 않았고 오랜 전쟁으로 약해진 왕권 때문인지 궁에도 이전처럼 인파가 들끓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자신의 인생에서 지금 이 순간들이 가장 평화롭다고 생각했다. 정원을 산책하던 에피가 노란 줄무늬가 있는 고양이를 몸을 쭈그린 채 품에 안고 있었다. 몇 걸음 뒤에서 지켜보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가가 보니 얼굴 표정도 평소와 다르게 잔뜩 풀린 채였다. 고양이가 고양이를 귀여워 하네. 그레이스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저를 따라 부쩍 평화로워 보이는 에피 알티스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

그레이스와 에피는 포로와 그의 호위기사라는 입장으로 만났으면서도 꽤 잘 지냈다. 그레이스는 호위 기사가 아니라 보모처럼 굴었다. 식사를 거르는 에피의 옆에 앉아 무례하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억지로 몇 수저 들게 하는 것은 기본이고 에피가 잠을 설치는 날이면 타인의 체온이 숙면에 좋다는 말을 다른 기사 예를 들면 닉 에게 듣고 와서는 감히 침대로 파고 들어 에피를 품에 끌어안았다. 천성적인 다정함 때문인 척 잘 포장했지만 사심이 섞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레이스는 귀여운 것들을 좋아했고 날카로운 칼끝처럼 다가가기만 해도 무언가 상처 입히던 상대가 한풀 꺾여 제게 의지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 모든 흥미와 애정 조건에 에피 알티스는 마치 운명처럼 적확하게 들어맞았다. 마치 그레이스 올비의 좌천은 이 만남을 위해 조작된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레이스는 제가 더 가까이 다가오자 고양이를 품에 꼭 안고 자신을 경계하며 몸을 움츠리는 에피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에피가 고양이를 쓰다듬었던 것처럼 에피의 붉은 머리카락을 조금 쓰다듬었다. 날이 추우니 들어갈까요. 고양이는 이만 놔 주시고.

 

03

 

입맞춤은 단순한 사고처럼 시작되었다.

그럴 의도가 없었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레이스는 조금 더 공을 들일 생각이었다. 타국의 왕자는 경계는 심했지만 의심하는 법을 잘 몰랐다. 호위 기사를 식탁 앞에 마주 앉게 해 주는 왕자라니, 정말이지 상상도 못 할 성격이 아닌가. 게다가 그간 어떻게 살아왔는지 몰라도 몸에 자잘한 상흔이 지나치게 많았다. 에피의 옷 시중을 몇 번 들어 본 그레이스는 곧 욕실까지 따라붙어 이 왕자가 얼마나 포로로서의 가치가 없는지 증명하는 흉터들을 발견했다. 자세한 내막을 알아 볼 생각은 들지 않았으나 이런 몸을 하고도 제 손길을 처음처럼 쳐내지 않는 에피가 귀여웠다. 이유를 말하자면 그것뿐이었다. 귀여워서.

어떻게 홀라당 눕힐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지만 그레이스는 호위 하나 없이 잠긴 방문을 등지고 침대 위로 누운 에피 위에 올라탔다. 타인이 발견한다면 그대로 참수 당해도 놀랍지 않을 장면이었다. ? 에피가 순진한 얼굴로 묻기에 그레이스는 그냥, 하고 몸을 숙여 입술과 입술을 맞췄다. , 하고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고 입술을 벌려 혀와 혀부터 섞이도록 다시 깊이 얽혀든다. 얇은 와이셔츠 위로 손을 올리자 여전히 마른 가슴과 그 아래 툭 튀어나온 갈비뼈 부분이 만져졌다. 그레이스는 젖은 입술로 에피의 뺨이며 귓가를 문지르다가 천천히 가슴을 더듬더니 이렇게 말했다. 왜 이렇게 살이 안 붙는 거야, 속상하게. 일개 호위 기사가 저에게 말을 놓는 것에도 에피는 저지하는 법이 없었다. 간지러운지 그의 어깨와 발 끝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레이스는 다시 입을 맞추며 급하게 하지 않을 거라고 달래듯이 속삭였다. 그레이스는 정말로 그럴 생각이 없었다. 느끼기에 모두가 이 왕자를 잊어가는 중이었고 그렇다면 다시 정기사로 복귀될 일 없는 그레이스에게는 시간이 꽤 많았다. 평화를 즐기는 일은 천천히 할수록 좋았다. 그러나 에피가 두 팔을 뻗어서 제 목에 감았을 때 그레이스는 입맞춤처럼 이 밤도 사고처럼 일어나겠구나, 하고 직감했다.

 

04

 

전쟁이 다시 시작됐다. 심지어 적국의 도발이 먼저였다. 포로로 데려간 왕자의 목이 잘려 금함에 담겨 돌아오자 왕은 분노했다. 왕은 분노 이후에 자신들에게도 승계 순위가 낮아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빨간 머리의 7왕자가 있음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자신의 병사들과 집행관들에게 명령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지. 그 자의 목을 쳐 금함에 담아라.

 

그레이스는 제 동료들이 다시 전쟁에 소집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선포는 며칠 전에 이루어졌고 인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그레이스가 다시 정기사로 복귀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선봉에 귀족 자제가 서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몸값이 지나치게 높고 힘든 훈련을 받지 않았을 테니까. 죽어도 문제 없으며 신분도 가족도 없는, 이미 오른쪽 얼굴이 한 번 망가진 남자가 방패막이로 쓰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었다. 명예를 주고 목숨을 취한다. 그레이스는 국가의 방식을 나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으나, 이전과 다르게 순순히 응할 생각도 없었다. 적국으로부터 선전포고가 도착한 그 순간부터 그레이스는 에피를 데리고 도망칠 준비를 시작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그레이스는 왕궁을 벗어나기 위해 에피의 빨간 머리를 후드로 가리고 거의 품에 안 듯이 숨겨 조심스럽게 지하수도로 향했다. 냄새가 고약하고 길이 어두웠지만 병사들에게 들키지 않고 탈출하기 위해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이 방법을 선택함으로써 그레이스 올비는 반역자 또는 배신자가 되었다. 그를 후원해 준 후작가에게는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었으나 에피의 목이 잘리게 둘 수는 없는 법이었다. 죽어도 괜찮다는 말을 할까 봐 그레이스는 제 도망치자는 제안에 대답하려는 에피에게 대뜸 입을 맞췄다. 대답하지 말아 줘. 그냥 나랑 같이 가. 우린 여길 떠날 거야. 그 말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다짐처럼 들리기도 했다.

 

05

 

그래서 두 사람은 무사히 도망쳤나요? 사랑의 도피는 성공적이었어요?

닉은 제게 질문하는 어린 딸에게 어깨를 으쓱이곤 그건 나도 모르지, 라고 대답했다. 딸은 아버지의 반응이 재미없다는 듯 금방 흥미를 잃고 다른 자잘한 장난감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레이스 올비와 에피 알티스가 수배 명단에 오른 지 몇 년이 지났지만 닉은 아직 그레이스와 에피가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그가 명확히 깨달은 것은, 잡혀 온 것이 공주가 아니더라도 로맨스는 시작되었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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