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은 늦지 않았다
  • 2020. 11. 29. 23:44




  • A

     

    나 사실 결혼했었어.

     

    이런 말을 아만다는 쉽게 믿지 않았다. 당신이 결혼했었고 상대가 고등학교 친구인 데다가 남자였었다고? , 시오. 농담을 하려면 믿을 만한 걸로 해야지, 너무 유치하잖아. 내가 아직도 일곱 살인 줄 아는 거야? 시오는 조수석 옆자리에 앉아 조잘조잘 더 못 믿을 이야기를 해 주겠다고 떠드는 조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흘긋 눈만 돌려 옆에 앉아 있는 것이 정말로 아만다인지 확인했다. 습관은 한 번 생긴 이후로 사라지는 법이 없었다. 더 놀라운 얘기 해 줄까? 자기 말을 끊고 시오가 말을 걸자 아만다는 조잘거리던 것을 뚝 멈추고 백미러를 통해 시오의 표정을 살폈다. 아만다는 삼촌이 알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사람이고 모두가 시오를 편하게 생각했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단호했고 또 스스로의 기준에서 좋은 일을 행하기 위해 대의를 버리는 일도 많은 사람. 아만다는 제 엄마가 왜 삼촌 얘기를 할 때면 혀를 차는지 알고 있었다. 쉰이 넘어서까지 독신이라니. 회계사에 성격도 생긴 것도, 심지어는 이것은 오로지 아만다의 추측이었다. - 성벽도 정상적인 백인 남자가 독신이라니! 뭔데? 아만다가 대답을 독촉하듯이 운전하는 시오의 팔을 툭 건드리자 시오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네가 어릴 때, 넌 우리 둘이 사는 주택에 온 적도 있었어. 네 엄마를 따라서 왔었지. 네 엄마가 우리한테 결혼이 장난이냐고 하는 동안 넌 우리 정원을 실컷 망치면서 놀았어. 장담하는데, 아만다의 기억 속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 아만다는 그저 시오가 곧 출산 예정인 조카를 놀리기 위해 하는 소리라고 생각하곤 크게 웃었다. 시오, 정말 재미없는 농담이지만 매번 우리 집까지 태워줘서 봐 줄게. 테드는 자기 일 바쁘다고 날 도통 태우러 오지 않는다니까. 애는 나 혼자 만들었나, 진짜 웃기지 않아? 시오는 빠르게 전환되는 아만다와의 대화 주제 속에서 옆을 흘긋거리는 것을 그만두고 앞만 보는 채로 대꾸했다. 테드가 자꾸 너한테 제대로 못 하면 언제든 맨하튼으로 와. 내가 아는 법조계 인사를 통해서 최고의 이혼 변호사를 찾아 줄 테니까. 아만다는 회계사인 시오가 왜 그렇게 많은 법조인을 알고 있는지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았다. 그저 막연하게, 시오 로의 백금발은 흰머리가 자라도 크게 티가 나지 않는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따름이었다.

     

    B

     

    나이가 든다는 것은 무던해지는 것이다.

     

    시오는 혼자 사는 아파트 17층에 내려 전자 키패드에 9자리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문은 기계음과 함께 열렸다. 맨하튼 한가운데 위치한 아파트는 엄청난 집세가 들면서도 방이라곤 화장실을 제외하고 고작 두 칸밖에 없었다. 심지어 거실과 부엌은 뚫려있었고. 보지도 않은 TV를 켜 놓고 방으로 돌아가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시오는 아만다를 내려주고 돌아오는 길에 윌마트에 들려 구매한 식료품을 와르르 테이블 위에 쏟아 놓았다. 그는 꽤 요리를 잘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직접 차려 먹는 대신 전자레인지에 돌려먹는 레토르트 제품을 선호했다. 1인분의 식사를 준비하는 일은 지나치게 비효율적이었다. 게다가 그는 종종 1인 가구를 위한 패키지가 아니라 2인 가구를 위한 패키지를 쇼핑 카트에 골라 담았다. 운전할 때 옆에 탄 사람을 곁눈질하는 일과 같이 그의 몸에 익은 오랜 습관이었다. 시오는 이런 나쁜 습관들을 억지로 고치려고 시도하는 대신 그 습관이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차에 더 많은 사람을 태우거나 아예 아무도 태우지 않기. 직접 요리해 먹는 대신 윌마트에 비치된 냉동 제품들의 위치를 파악하기. 켜 놓은 TV에서 조잡한 광고의 캐치 프라이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흔한 관광지와 자기 주에 위치한 발전 덜 된 마을을 홍보하는 목소리가 성별 구분 없이 섞여 들렸다. ■■■로 오세요. 이곳은 당신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상실은 해가 갈수록 시오 로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그는 정말 잘 지냈다. 휴가가 길어졌던 탓에 밀린 업무에 시달리느라 시데라티오에서 돌아온 첫 주는 그 땅과 성에 대해서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 카일란에 대해서도 엇비슷했다. 3년이나 없었던 사람이니 이제 와 잃은 자리를 새삼스럽게 느끼는 것도 우스웠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연락이 끊겨 생사를 알지 못하는 것과 그가 확실하게 죽었음을 아는 일은 다른 법이라, 시오 로는 그다음 한 달은 체중이 조금 줄고 눈에 띄게 우울해 보였다. 회사 동료들이 무슨 일 있냐고 물어와도 그저 그냥, 이라고 대답할 따름이었다. 시오의 누나인 니나 로는 카일란 드라이의 죽음을 시오 다음으로 알게 된 사람이었다. 너는 장례식에도 날 안 부르니? 니나의 반응은 딱 이 정도였다. 그리고는 덧붙이는 것이다. 걔가 꼭 남자여서가 아니라, 나는 그 애가 마음에 안 들었어. 언젠가 널 상처 입힐 것 같았거든. 다이애나나 찰리처럼 말이야. 네가 사랑하는 것들은 꼭 널 아프게 하잖니. 시오는 그 말을 듣고 어설프게 웃으며 니나에게 대답했다. 하지만 누나, 난 누나도 사랑하는 걸. 니나가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지금 내가 널 또 아프게 하고 있잖아.

    한 해가 지나고 나서 시오 로는 카일란 드라이와 살던 공동 주택을 처분했다. 일단 혼자서 살기엔 너무 넓었고 집세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법적 배우자의 상실로 인해 정부 지원금이 끊긴 것 등이 그 이유였다. 거기서 더이상 살 필요가 없었다. 시오는 이제 두 대의 차가 들어갈 만큼의 차고도 필요 없었고 침실도 하나면 충분했다. 스스로 요리하지 않게 된 시점도 이때부터였다. 둘이 먹을 만큼을 만드는 것에 익숙해진 탓에 한 명 분량의 식사를 만들면 늘 간 조절을 실패했다. 시오는 자신이 무의식중에 일부러 요리를 실패한다고 생각했다.

    흰 머리가 나기 시작했고 주름이 잡혔다. 7살이던 조카 아만다의 결혼식에 참석했을 즘에 니나가 지나가는 말로 너도 늦었지만 다시 결혼하는 건 어떠냐고 말을 던졌다. 다이애나는 관절염 때문에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했기 때문에 손녀의 결혼식에 뒤늦게 찾아왔다. 우리 엄마도 재혼 안 했는데. 시오가 반박하듯 말하자 니나가 한숨을 쉬었다. 다이애나는 아들과 딸 사이로 느릿느릿 바퀴를 밀고 오면서 물었다. 카일란은 어디 있니? 다이애나의 나이는 너무 많은 것을 망각하고, 또 너무 많은 것을 다시 떠올리기에 적합했다. 당황한 니나와 다르게 시오는 아무렇지 않게 다이애나의 휠체어를 밀며 아만다를 축하해주러 갔다. 다이애나가 다시 물었다. 너희가 아이를 입양하면엄마가 꼭 키워 줄 거야. 내가 너희한테는 많이 못 해줬잖니. 그렇지? 시오와 니나가 다이애나를 요양병원에 보낸 것이 고작 3년 전이었다. 아만다는 다이애나와 시오를 보고서는 드레스 차림으로 부케를 흔들며 뛰어왔다. 할머니! 다이애나는 모든 일들을 종종 잊어버리게 되기 전에, 정말로 괜찮은 할머니가 되었다. 엄마 역할을 제대로 못한 것에 대한 부채감이 한 사람을 대단한 할머니로 만든다는 것이 시오는 역설적이라고 생각했다. 뛰어온 아만다 뒤에서 새신랑이 된 테드가 시오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시오는 미소지었다. 난 잘 지내고 있어.

     

    C

     

    시오는 문득 카일란과 자신이 결혼반지를 맞추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한다. 카일란이 어느 날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비했던 시계는 약을 채워 넣어도 째깍거리지 않게 되어 계속 차고 다닐 수 없게 되었다. 시간은 그런 것이다. 흔적은 낡는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약속이 희미해질 만큼 무던해진다는 것이다. 왜 집에 초대해 주지 않나요? 가장 최근까지 시오와 데이트했던 세 살 연상의 재키는 시오에게 그렇게 물었다. 재키는 한 번 이혼한 경력이 있는 자신과 다르게 시오가 미혼이라고 생각했다. 시오의 왼손 약지에는 아무것도 끼워져 있지 않았고, 심지어는 반지를 끼고 다녔다는 흔적 하나 없었으니까. 낡은 시계가 떨어져 나간 손목에는 다시 새로운 시계가 채워지지 않았고 시오 로는 이제 공동 주택에 살지 않으면서도 사람을 집으로 초대하지 않았다. 시오, 당신이 깊은 관계를 맺는 일에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아요. 재키는 그렇게 말했다. 재키에게는 이제 성인이 된 딸이 한 명 있었고, 시오는 재키가 자신과 재혼하고 싶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서두를 필요는 없었으나 시오는 자신이 늙어 죽을 때까지 회계사로서 일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결혼하지 않고 평생을 맨하튼 아파트에서 독거노인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도. 자신이 다이애나처럼 관절염을 앓거나 지난 기억들을 단편적으로 삭제하고 기억하는 병을 앓게 될 수도 있다는 걸 시오 역시도 알고 있었다. 재키가 덧붙였다. 이제 혼자 살기에는 당신도 나도 둘 다 너무 늙었으니까.

     

    기다린다는 것은 무엇일까?

    장례는커녕 시체조차 확인하지 못한 배우자가 다시 문을 두드리며 다녀왔어, 라고 하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무엇일까. 시오는 재키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날의 데이트는 침묵 속에서 끝났고 재키는 약 일주일 동안 시오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시오는 일주일이 지나기 전에 재키에게 사과하고 싶다는 내용의 문자 메시지를 남겼다. 늘 이런 식이었다. 카일란 드라이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시오 로였다. 그래서 그 누구도 시오 로에게 카일란 드라이의 자리를 채워 줄 수가 없었다. 곧 온다더니 너무 늦잖아. 시곗줄 없이 몸체만 남은 낡은 시계를 꺼내 볼 때면 시오는 명치 아래부터 어딘가 먹먹한 기분이 들어 숨을 잘 쉴 수가 없었다. 내가 거기에 너를 버리고 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후회는 늘 짧고 강렬하게 그의 가슴을 치고 지나갔다.

     

    기다릴게.

    너무 늦으면, 안 돼.

     

    D

     

    아만다가 아이를 낳았다. 다이애나는 이제 증손녀를 본 것이고 니나는 할머니가 되었다. 애 이름은 정했어? 시오가 베이비 샤워를 위한 선물을 들고 아만다의 집으로 향했을 때 아만다는 조금 지치고 떡진 머리를 한 채로 아이를 안고서 고개를 저었다. , 시오. 제발 들어 봐. 테드는 글쎄 자기 딸 이름을 빅토리아로 하고 싶다는데 너무 촌스럽지 않아? 우리는 사흘 내내 딸 이름 때문에 싸우는 중이야. 내가 낳았지 자기가 낳았나? 시오는 그 말을 듣고 조금 웃었다. 아만다라는 이름도 그렇게 세련되지는 않잖아. 테드가 뒤에서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침대에 누워있던 아만다가 몸을 반쯤 일으키며 뭐? 하고 테드를 노려보자 기가 죽은 테드가 덧붙였다. 아니, 내 말은아만다도 촌스러울지언정 예쁘지 않냐는 뜻이었지.

    시오는 카일란과 자신이 아만다와 테드처럼 사회가 인식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가정을 꾸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니나와 다이애나, 그리고 아만다와 시오는 성별뿐만 아니라 모든 부분에서 지나치게 달랐다. 니나라면 시오처럼 죽은 배우자가 살아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않았을 것이다. 시오는 자신과 그나마 닮은 것이 다이애나라고 생각했지만 다이애나 역시도 찰리의 죽음을 부정하기만 했을 뿐 그가 살아올 것이라고 믿지는 않았다. 시오는 종종 요양병원을 찾아가 이상한 소리를 하는 다이애나에게 찰리에 대해 이야기했다. 다이애나의 입에서 얼굴도 거의 잊어버린 아버지 찰리에 대한 흔적을 찾아보려고 했던 것이다. 죽은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큰 존재였든 희미해지고 마니까. 우리 크리스마스에 꼬마전구 장식한 거 기억하세요? 우리가 샌프란시스코 살 때시오가 그렇게 말하면 다이애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절대로 찰리에 대해서 말하지는 않았다. 마치 희미해지기만을 기다리며 세월을 보낸 사람처럼. 보니페이스에 대해서도, 불법 포커장에 대해서도, 그리고 찰리 로에 대해서도. 시오는 자신이 다이애나처럼 카일란 드라이에 대해서 입 밖으로 뱉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닌가 몇 번 고민했다. 하지만 그런 고민은 바보 같은 것이다. 시오 로는 금기를 만드는 일에 다이애나만큼 재능이 없었다.

     

    재키가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크리스마스에 만나기로 했던 약속 취소할게요.

    시오 로는 자신이 이번에도 차였음을 깨달았다. 놀라울 일도 아니었다. 굳이 답장을 했다. 그래요,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요. 다시는 재키에게 답장이 오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허전한 마음이 들었지만 상실감이 크지는 않았다. 이대로 혼자서 살아도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며칠 남지 않은 크리스마스에는 눈이 올 것이라고 했다.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시오는 결혼기념일을 같이 생각했다. 빌어먹을, 왜 크리스마스 이브에 혼인 신고를 해서.

     

    E

     

    방문객이 있었다.

    재키는 아니었다. 안 온다고 했으니까. 애초에 만났어도 집에서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시오는 집에 사람을 초대하지 않으니까. 캐롤이 울리는 시끄러운 맨하튼의 밤을 배경으로 열린 현관문 너머에 여전히 젊은 얼굴의 카일란 드라이가 서 있었다. 너무 늦었나? 시오는 목이 다 늘어난 스웨터를 입고 실내용 슬리퍼를 신은 채로 문을 열었다가 할 말을 잃었다. 추위가 손끝과 코를 붉게 만드는 것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시오는 한참 대답이 없다가 카일란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두 걸음 물러섰다. 바깥이 춥기는 했는지 카일란의 손끝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미안, 나 실내용 슬리퍼가 하나밖에 없어서. 그냥 신발 신고 들어와도 돼. 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키패드의 기계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리고는 철컥, 잠기는 소리까지 난 뒤에야 시오가 대답했다. 나는 잘 지냈어. 너무 잘 지내서많이 늙었지. 미안해, 내가 너무 많이……

     

    시오가 보지도 않으면서 틀어둔 TV에서 조잡한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흔한 관광지와 자기 주에 위치한 발전 덜 된 마을을 홍보하는 목소리가 성별 구분 없이 섞여 들렸다. ■■■로 오세요. 이곳은 당신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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