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케이시, 원대한 백곰, 거대한 소라게… 세 사람은 대한민국 오타쿠 동인계를 강타한 모 스포츠물 웹툰의 흥행 이후 뭉친 농.친.녀 모임이었다. 농구에 미친 여자들. 농구를 위해 일상을 팔아먹은 여자들….

 

비록 2D 농구 웹툰을 접하기 전까진 농구의 ‘ㄴ’도 몰랐던 그들이지만, 이제는 세 사람 모두 훌륭한 농구 씹덕으로 거듭난 상태였다. 얼마나 대단한 씹덕이었는지, 2D로 입덕했던 그들은 더 이상 화면 너머의 농구 코트로 만족하지 못했다.

 

직접 가서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볼 테다. 세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현실 한국 농구의 길을 걷기로 한다. 내가 똑똑히 봤슈. SK 나이츠 김서한이 3점 슛 넣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다니까!

 

저 셋 중 맛있는 케이시(이하 케이시)는 SK 나이츠 김서한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녀는 원래 안경 쓰는 남자에게 사족을 못 썼다. 사람을 안경 받침대로 보는 맛있는 케이시에게 김서한은 훌륭한 덕질 대상이었다. 농구=좋음, 안경=좋음, 그런데 농구도 하고 안경도 써? 존나 좋음.

 

그러나 케이시만 KBL을 보고 다른 두 사람은 저벅저벅 각자의 선호 취향존을 찾아 흩어졌다. 불행하게도 농구라는 스포츠는 다른 구기 종목과 마찬가지로 공식 혼성 경기가 마련되지 않았다. 하지만 원대한 백곰(이하 백곰)은 여미새였다. 여자에 미친 새끼가 남자 농구를 볼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의 거대한 소라게(이하 소라게)는 무엇인가…. 그녀는 오로지 얼굴만 봤다. 난 농구공만큼 선수 얼굴도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해. 무슨 말인지 이해하니? 농구력은 얼굴에서 나오는 거야. 그렇게 소라게는 크고 강인하고 아름다운 여자들이 잔뜩 있는 WKBL로 향했다.

 

2D 웹툰판에서 만났을 때 같은 좌상고 리버시블 절대 불가 신이여 리버스를 멸하소서!!! CP를 잡았던 세 사람은 현실 농구로 전직하며 돌잡이로 잡은 최애가 나뉘게 되었다. 애초에 케이시는 KBL로 가고 백곰과 소라게는 WKBL로 향했으니, 잡은 최애 성별도 둘로 나뉘었다.

 

그러나 최애가 달라지는 건 그들에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원래 CP 돌잡이 친구는 지구가 멸망해도 같은 곳에서 다시 만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최석현이랑 김서한 사귐? 이라는 물음과 함께 다시 한번 망붕의 장에서 소모임을 가졌다.

 

“김서한이 최석현 좋아한다는 데 가X지 타X 피규어 검.”

“난 최석현도 김서한한테 마음 있다는 거에 내 안경남 콜렉션 걸겠음.”

“다들 미적지근한걸? 원작이 모호할수록 동인에서 악셀을 밟아줘야 함. 난 둘이 이미 사귀고 있다는 것에 호텔 뷔페 식사권 3인 건다.”

“소라게 미쳤나 봐.”

“가만히 둬. 원래 쟤 정신 나가면 돈지랄 해. 뷔페나 가자.”

 

이 셋은 현실 농구 전직 후 정확히 반년 만에 ‘최석현이랑 김서한 사귀는 것 같지 않냐?’ 라는 메시지와 함께 다시 모였다. 그랬다. 그들은 원래 2D판에서도 헤테로만 팠다. 돌잡이 취향은 2D가 3D 된다고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 농구는 주인공 팀의 승리가 보장된 웹툰과는 거리가 멀었다. 케이시는 석현서한이 사귄다고 믿으면서도 김서한이 득점 한 번 잘못할 때마다 입에 게거품을 물었다. 아! 연봉 그렇게 받고 3점 슛을 못 넣으면 어떡해! 세금 더 내라!

 

이런 마당에 농구 선수끼리 진짜로 사귄다? 그건 절대로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앞으로 자유투 할 때마다 상대 선수의 등신대가 관객석에 등장하게 될 터였다. 이기면 우리 선수 경기력 올려준 최고의 배우자로 추앙받겠지만, 지면 연애한다고 농구에 집중 못 하는 역적 되기 딱 좋았다.

 

그래서 세 사람은 모일 때마다 망붕을 조지게 했어도 최석현과 김서한이 사귀길 바라지 않았다. 물론 소라게는 미친 자였으므로 최석현이 그 왕자님 유전자를 길이길이 보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귀어. 석현아. 나는 80까지 농구 볼 거다. 네 딸, 네 손주… 난 다 봐야겠어.

 

그렇게 세 사람은 좋아하는 선수의 팬카페도 가입하고 구단 경기도 쫓아다니며 행복한 농.친.녀 생활을 이어갔다. 경기 시즌이면 셋이서 이틀에 한 번꼴로 만날 때도 있었다. 가족보다 많이 보는 덕친이었으니, 이미 가족과 다를 바 없었다.

 

“백곰아. 최석현 미국 간다며.”

“어. 김서한 곧 군대 가잖아.”

“김서한이 군대 가는데 왜 우리 석현이가 미국에 가. 물론 잘 됐지만, 정말 최고지만….”

“팬카페에도 글 올라왔던데. 곧 그만둘 것 같다고.”

“걔도 댓글 담? 평생주장핸가 뭔가. 걔 정보가 제일 확실하잖아.”

“평생주장해 그거 김서한이잖아.”

“리얼?”

“다들 아는데 모르는 척해주는 거야.”

“아무래도 석현서한 진짜 사귀는 듯.”

 

그날도 세 여인은 수상하게 모여 석현서한 진짜 사귀는 듯… 같은 소리나 지껄였다. 안타깝게도 이 셋이 파는 석현서한은 메이저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WKBL 판의 RPS 주도권은 GL판이 꽉 잡고 있었으니까.

 

[여농 파는데 왜 남선 데려옴? 역적 아님?]

 

이 말은 케이시가 SNS 계정 굴리다가 받은 익명 질문 글이었다. 케이시는 석현서한 좀 팠다고 최석현의 대메이저 RPS CP 석현가은 판으로부터 조리돌림까지 당했다. 여농판에 남자 선수 끌고 왔다고 사이버 머리채를 쥐어뜯길 만큼 뜯긴 상태였다.

 

게다가 최석현의 RPS판은 석현가은에서 끝이 아니었다. 석현애리도 있었다. 최석현은 죄 많은 여자라서 같은 팀 선수들과 모두 한 번씩 엮여봤다. 그녀는 짧머 부치에 미치는 여자들의 신, 빛, 최석현, 그저 나, 같은 존재였다.

 

케이시는 온갖 최석현 관련 GL CP에 머리채를 뜯기다 탈모 오기 전에 간신히 SNS를 접은 상태였다. 그러곤 자물쇠 달린 비공계 개정을 파 억울함을 성토했다. 미친 내가 아무리 마이너여도 그렇지, 최석현이랑 김서한은 진짜로 수상하다니까? 걔네 심지어 고교 동창이랍시고 직관도 같이 다닌다니까?

 

다행히 케이시와 완전히 취향이 겹치는 백곰과 소라게는 다른 CP판에 스카우트 되는 일 없이 케이시의 주장에 MBTI F 공감을 해줬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난 우리 말만 맞고 나머지가 다 틀렸다고 봐. 마이너라고 기죽지 말자. 석현가은은 결혼 못 하는데 석현서한은 운 좋으면 결혼할 수 있음. 보수적인 대한민국 생활 동반자법 개선해야 함.

 

그러다 디X패치가 사달을 낸 것이다. 아이돌이나 배우도 아니고 농구 선수 입술 박치기 장면을 정면으로 찍어 올리다니. K-POP 아이돌 열애설 터졌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최석현과 김서한의 뽀뽀 씬은 제법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뭐야, 얘네 다리가 어디까지 있는 거예요….

 

최석현의 RPS 팬덤은 그대로 발칵 뒤집혔다. 우리 CP가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석현가은 절대 지지자들은 우리 석현이가 남자랑 만날 리 없다며 왁왁거렸지만, 석현애리를 파던 사람들은 금방 태도를 바꿨다.

 

“야… 그래도 김서한이잖아. 인정하자….”

 

다른 남자면 모를까 김서한이래잖아…. 최석현 팬카페에 가입한 사람이라면 ‘평생주장해’라는 닉네임의 최고등급회원이 김서한이라는 걸 모르기도 어려웠다. 경기 분석 글마다 논문 쓰고 있는 사람을 어떻게 몰라보겠는가.

 

게다가 그놈의 인별에(이래서 SNS는 사회악이다.) 최석현이 올리는 남의 사진은 죄다 김서한뿐이었다. 김서한의 인별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바글바글해도 모든 사진에 함정 카드처럼 최석현이 껴 있었다.

 

강경 GL러들은 우두커니 섰다. 너와 나의 CP질이 마지막이면 어떡해. 최석현 연애해서 GL 세상에 빙하기가 오면 어떡해. 하지만 응원하는 선수가 연애한다는데 ‘아! 아니라고! 내 세상에선 GL만 존재한다고!’ 하며 드러누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최석현 RPS 팬덤은 이렇게 된 거 김서한을 뇨타 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인정하기로 한다. 적폐는 적폐고 현실 연애는 현실 연애니까. 그랬다. 농구판은 연애 좀 한다고 사과문 써야 하는 아이돌판과는 궤가 달랐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겪은 세 여자… 케이시와 백곰, 소라게는 비즈니스 호텔 룸에 모여 석현서한 웨딩 카페 주최 논의를 하고 있었다.

 

“야, 어떡해? 우리 방금까지만 해도 마이너였는데 진짜 됨.”

“오늘도 출근길 투샷 나왔다. 소라게가 옳았다고.”

“나한테 피규어랑 안경남 콜렉션 빨리 넘겨.”

“우리의 의리를 봐서 한 번만 봐주라.”

“제발. 너 온리전에 회지 낼 때 내가 축전도 그려줬잖아.”

 

소라게는 케이시와 백곰을 절대 봐주지 않았다. 피규어와 안경남 콜렉션을 빼앗는 대신 석현서한 웨딩 카페 협력진으로 둘을 무급 기용한 것이다.

 

“그런데 결혼도 안 했는데 웨딩 카페 먼저 열어도 돼?”

“알 바? 원래 이런 건 원작이 미적지근할수록 동인이 힘을 내야 한다고.”

“현실 농구에서도 내가 이러고 있을 줄 몰랐다.”

 

세 사람은 케이시가 가져온 노트북 앞에 옹기종기 모여 웨딩 카페 대관처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봄이 찾아온 3월, 5월에 열리는 웨딩 카페 주최하기 딱 좋은 계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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