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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감독은 액션 느와르 장르 영화판에서 어느 정도 입지를 가지고 있는 영화감독으로, 예술계 엘리트 코스라는 예중 예고는 물론이고 많은 유명 연출 및 감독을 배출한 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영화 열 편을 찍으면 그중 일곱 편은 성공하는 영화감독계의 흥행 보증수표와 같은 사람이었고 관객들도 그의 영화가 개봉한다고 하면 내용이나 출연 배우들을 모르더라도 한 번 정도는 P 감독 영화래? 하면서 극장에 고개를 들이밀곤 했다. P 감독의 인생은 그야말로 모든 영화감독들이 꿈에 그리는 탄탄대로 엘리트 성공 코스였다. 지난 두 번의 영화가 개봉과 동시에 쫄딱 망하기 전까지는. 연기력이 보장되지 않은 아이돌 출신 배우를 소속사와 배급사의 알력다툼 때문에 주연으로 내세운 게 문제였다. 스토리가 아무리 대박이고 미장셴이 죽여줘도 사람들은 발 연기를 쉽게 견뎌주지 않았다. 항간에서는 P 감독에 대해 감을 잃고 한물 간 감독이라고 떠들어대기도 했다. 엘리트 코스 밟은 사람들은 진짜 예술을 못한다는 평론가들의 근본 없는 시비 털기에 견디다 못한 P 감독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새롭게 시작하는 영화에 최고의 배우들만 기용하겠다고 이를 갈았다. 예를 들면 탑스타 예리엘 같은 배우만 쓸 거라고, 알겠어? 테이블을 소심하게 탕 내리치는 P 감독을 옆에서 측은한 눈빛으로 보던 조명 스탭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 영화 망한 거 감독님 탓 아닌 거 아시죠? 울지 마세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너무 많다>

 

예리엘은 끈질기게 들어오는 P 감독의 러브콜에 결국 질린 얼굴로 매니저를 통해 영화 출연 의사를 밝혔다. 예리엘이 보기에도 이번 P 감독의 시나리오는 흥미로운 구석이 있었다. 보통 액션 느와르 영화라고 하면 남자 둘을 주연으로 내세워 알탕 영화로 비벼 섞어 찍는 것이 태반인데 남녀 주연을 앞에 내세운다는 것부터가 그랬다. 게다가 남녀 투탑 주연인데도 여자 쪽이 액션 부분에서 메인인 것까지 기존 장르에 대한 고정관념을 완전히 전복 시키는 구조였다. 하지만 이런 작품에 대한 흥미와 별개로 예리엘은 몇 년 만에 맞이하는 휴식기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데뷔 후 지난 몇 년간 타고난 냉미녀 페이스와 괜찮은 연기력, 스턴트 배우를 대신 쓰지 않아도 될 만큼의 신체 능력으로 작품 몇 개를 연달아 찍고 세계적 탑스타 대열에 합류한 그녀는 바쁘고 치열하게 살아왔던 몇 년을 보상 받기 위해 적어도 1년의 휴식기를 가지기로 소속 에이전시와 어렵게 타협을 해 둔 상황이었다. 배우 생활을 오래 하기 위해서는 일과 생활의 밸런스가 맞아야 한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예리엘이 P 감독의 러브콜을 거절하자 P 감독은 처음에는 쿨한 척 당신 말고도 배역을 할 사람은 많아요, 하고 물러나는 듯 하더니 며칠 뒤 눈물 젖은 얼굴로 예리엘 앞에 돌아와서는 당신 아니면 내 영화 주인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하고 예리엘의 바짓가랑이를 물고 늘어졌다. 한 번만! 내 영화! 주연해 줘! 예리엘은 결국 거머리보다 끈질긴 P 감독에게 출연 수락 의사를 표했다. 그런데상대 배우는 누구인가요? 남자 주연이요.

주연 자리에 유명 배우 예리엘이 합류했다는 사실이 돌자 남은 남 주연 자리를 위한 오디션은 그야말로 피 튀기는 전쟁터와 다를 바 없었다. P 감독은 오디션 자리마다 참석해 얼굴이 좀 반반하면서도 액션 느와르를 잘 소화할 수 있을 만큼 스턴트 맨 없이도 무기를 잘 다루고 몸선이 곧고 예쁜 남배우를 찾기 위해 열을 올렸다. 이름 졸 날렸다 하는 탑배우들조차도 P 감독의 그게 아냐! 소리만 듣고 오디션에서 생수 대신 본인 눈물만 마시며 집으로 돌아가는 가운데 몇 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배역에 낙점된 것은 소극장 연극배우 출신이라던 바질이었다. 부드러운 느낌의 소년 같은 외모와 달리 유연성은 물론이고 무기 다루는 실력까지 스턴트 맨 급으로 좋은 바질은 딱 P 감독이 찾던 인재였다. 연기력과 딕션이 보증되는 연극판에 있었다는 점까지 P 감독의 마음에 쏙 들었다. 상대 배우가 누구냐는 예리엘의 질문에 P 감독은 득의양양하게 보면 당신도 좋아하게 될 배우라고 말했다. P 감독은 이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이 에피소드를 술자리마다 가지고 나가 스스로 앞 일을 내다볼 줄 안다고 매번 같은 레파토리로 말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렇게 P 감독의 신작은 문화부 기자들과 영화평론가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작품으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크랭크 인 일자가 정해질 때부터 촬영 장소를 어떻게 알아낸 건지 파파라치들이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것은 예사였고 공식 측에서 풀지 않은 비공식 촬영 이미지가 온라인을 통해 여기저기 퍼져나가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사람들은 이전 P 감독의 망작들을 생각해 보았을 때 탑스타 예리엘의 이름만 대문짝만하게 건 먹을 것 없는 소문난 잔치가 되고 끝날 것이라고 입을 털었다. 게다가 예리엘에 비해 바질이 상대적으로 유명세가 적고 경력이 짧으니 두 주연이 서로 비교될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는 경우도 많았다. 내 생각에 두 사람 어울리지도 않는 듯. 네티즌 여론이 부정적으로 흘러간다 싶을 무렵에 후퇴 없이 개봉한 영화는 전례 없는 초대박을 쳤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유독 많았기 때문이었다. 두 주연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글을 쓴 네티즌은 과거의 나 자신을 두들겨 패는 댓글을 달며 영화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예리엘 액션이 오지고요, 바질 우는 얼굴이 친절해요. 그리고 제 생각에 이 두 사람은 사귀는 것 같습니다. 과거의 제가 뭘 모르는 새끼였네요. 이 두 사람이 어울리지 않는다면 치킨과 맥주도 함께할 수 없는 사이나 다름없습니다. 어쩌구저쩌구.

 

<물 들어올 때 노 젓고 열애설 터질 때 연애도 해>

 

P 감독의 영화가 대성하자 예리엘과 바질의 몸값은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졌다. 감독은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한다는 말과 함께 영화 홍보 차원에서 여러 예능 프로그램에 두 사람을 내보냈고 방송 하나가 방영될 때마다 바질과 예리엘의 팬덤은 좋은 의미로 뒤집어졌다. 예리엘을 아씨라고 부르며 고전적인 어투를 사용하고, 현대인답지 않은 엉뚱한 행동을 하는 - 생긴 건 완전 왕자님인데 - 바질은 30km 전방에서 열차를 타고 가면서 봐도 덕후몰이를 하기에 최적화된 인간이었다. 그런 바질에게 탑스타 예리얼이 또 칼 같아 보이는 겉보기와 다르게 아기자기한 장난을 치고 있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힐 때마다 팬들은 혹시? 이거? 뭐지? 하고 자기들끼리 망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영화 내용을 기반해 나오던 수많은 팬 메이드 연성들은 어느 순간부터 영화 캐릭터가 아닌 배우 본체를 대상으로 그려지고, 영화 중후반부에 한 번 있는 두 사람의 키스신이 '_때문에_설레는_헤테로_.gif' 같은 제목으로 크롭되어 돌아다니게 되면서부터 예리엘과 바질은 온갖 창작물에서 이 버전으로 엮이고 저 버전으로 엮이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두 사람 사이에 열애설이 터지는 것은 물이 아래로 흐르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망상 붕괴 필터를 두 눈에 장착한 팬들이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지? 하고 이마를 싸매는 동안 실제로 바질이 꽤 마음에 들었던 예리엘은 저를 이름도 아니고 꼬박꼬박 극존칭어를 써서 부르는 바질을 옆에 끼고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공적인 자리가 아니라 사적인 자리였으므로 바질은 나중에야 눈치 챘지만 확실히 식사 커피 영화 순서라는 점에서 일반 연인들의 데이트와 별 다를 것 없기는 했다. 파파라치들에게 개인적으로 만난 자리에서의 사진이 찍힌 두 사람은 오이오이 역시 저 두 사람 연애 할 줄 알았다고? 하지만 행복하면 OK입니다! 같은 축하의 물결로 - 아직 아무도 공식 인정하지 않았는데 - 도배되는 온라인 커뮤니티와 기사 댓글란을 보며 각자의 이유로 조금 웃었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려던 게 거의 댐이 터져서 홍수가 난 상황이었음에도 예리엘은 드물게 이 상황이 웃겨 바질의 팔을 잡아 제 쪽으로 당겨 오며 물었다. 바질, 우리 이렇게 된 거 열애설 인정하게 진짜 연애할까요? 난 농담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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