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과 진의 언니는 고작 두 살 터울이었다. 태생부터 남자는커녕 여자에게도 관심이 연애적인 감정이라고는 한 번 느껴본 적 없었던 진은 또래 평균보다는 빠르게 자신이 무성애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진과 다르게 진의 언니는 슈퍼-시스젠더-헤테로였다. 진은 언니가 남자를 좋아해도 너무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진의 언니는 머리가 좀 컸다 할 수 있는 중학교부터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남자친구를 사귀었고 아직 진이 초등학생이던 시절에 첫 경험을 마쳤다. 진은 누구에게든 자신의 새로운 경험을 자랑하고 싶어 했던 열다섯의 언니가 들뜬 목소리로 부모님의 눈을 피해 자신을 붙잡고 조잘조잘 떠들던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자매는 좁은 침대에 서로의 팔이 겹쳐 닿을 만큼 가까이 붙어 누워 서로의 이야기를 공유했다. 언니가 말했다. 진아, 그래도 있지. 난 네가 있어서 좋아. 내가 이런 말을 또 누구한테 하겠어.
K차녀 이야기 - 진 편
진은 자신에게 자매가 있는 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따지자면 좋아하는 편이었다. 부모님에게 하지 못할 말들을 언니에게는 할 수 있었으니까. 진 본인을 제외하고 자신이 무성애자라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린 상대도 언니였다. 언니는 그냥 네가 사춘기라서 그럴지도 몰라, 라는 반응으로 진의 정체성을 멋대로 정립해 버렸지만 그렇다고 동생을 완전히 부정하거나 부모님에게 쟤는 남자도 여자도 싫대, 하고 일러바치는 일은 없었다. 나이가 들면서 진은 언니와 같은 침대에 누워 서로의 이야기를 하는 일이 줄어들었다. 교복을 입을 때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공유했던 자매의 옷장은 두 사람이 모두 대학에 진학하고 난 뒤부터는 완전히 두 개로 분리되었다. 캐주얼하고 편한 차림을 선호하는 진과 다르게 언니는 하늘하늘한 스타일의 쉬폰 원피스나 블라우스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애들은 동생이랑 옷도 같이 산다는데. 인터넷 쇼핑몰을 뒤적거리며 언니가 서운하다는 듯이 말할 때마다 진은 언니가 성가셔졌다고 생각했다.
사건은 진이 대학교 졸업반이 된 시점에 터졌다. 진은 만날 때마다 남자친구 이야기를 하는 언니를 귀찮아했고 언니는 어린 시절만큼 자신의 이야기에 맞장구 쳐 주지 않는 진을 서운해 했다. 자매 사이가 데면데면해진 것은 놀라울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데이트 비용이며 자기 관리 비용이며 돈이 드는 곳이 많았던 진의 언니는 대학생 시절부터 온갖 아르바이트들을 전전하더니, 대학 졸업 직전에 괜찮은 일자리를 찾아 취직까지 했다. 아직 대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진과 언니의 격차는 조금 더 크게 벌어졌다. 진은 첫 월급을 탔다고 제게도 얼마 정도 용돈을 챙겨주는 언니가 고작 두 살 터울인데도 지나치게 어른스러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점점 거리가 멀어져 가던 자매 사이는 자연스럽게 좁혀지는 대신 언니가 혼전 임신을 하게 되면서 극단적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다음 날 1교시 강의가 있어 일찍이 잠자리에 들었던 진은 술에 취해 들어와서 제 침대 머리맡에서 훌쩍거리며 울고 있는 언니 때문에 잠에서 깼다. 뭐야? 진이 비몽사몽인 정신을 추스르며 우는 언니를 반쯤 뜬 눈으로 쳐다보는데 언니는 어린 시절 그랬던 것처럼 진의 침대로 기어 들어와 엉엉 울기만 했다. 언니 왜 그래, 하고 진이 아무리 물어도 대답이 없었다. 진은 언니가 아무 말 하지 않았음에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언니가 우는 대부분의 문제의 근원에는 항상 남자들이 있었다. 언니는 고등학교 때 사귀던 양아치 새끼가 다른 반 여자애랑 바람이 났을 때도 이렇게 울었고 대학교 때 잠깐 사귀다 헤어진 카페 알바생이 자신을 스토킹하기 시작했을 때도 이렇게 울었다. 또 뭐더라, 군대 제대까지 기다려 줬더니 나오자마자 언니한테 헤어지자고 한 쌍놈 때도 이런 식으로 울었다. 진은 매번 울기만 하면서 남자 없이는 못 사는 것처럼 연애를 해대는 슈퍼-시스젠더-헤테로 친언니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늘 가장 먼저 언니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새벽에 단잠에서 강제로 깬 탓에 언니가 귀찮게 느껴지고 짜증이 밀려오기는 했지만 진은 그래도 침착하게 물었다. 왜, 이번엔 또 어떤 개새끼야? 진의 물음에 언니는 더 서럽게 울기만 했다. 진은 이번에야말로 언니가 큰일이 났구나, 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언니가 숨 넘어 갈 듯이 우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누구 애인지도 모르겠어. 진은 그 순간 잠이 확 깼다.
엄마는 항상 언니보다 진을 더 걱정했다. 20대 중반이 됐는데도 날마다 집에 미래의 사위라며 여러 남자를 바꿔 데려오던 언니와 다르게 진은 한 번도 누굴 사귄다는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말을 안 하는 거겠지, 하며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편인 아빠조차도 진에게 걱정스럽게 우리는 네가 여자를 좋아해도 이해한다, 따위의 헛소리나 늘어놓았다. 진은 최근에야 결국 참지 못하고 자신이 무성애자임을 가족 전체에게 알렸지만 부모님은 김무성 말고는 무성애자의 무성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네가 아직 어려서 그래, 라는 말을 들을 줄은 알았지만 정말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그 문장 그대로를 들어버린 진은 맥이 빠졌다. 그 세대 어른들이란 대개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고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것만이 정상적이라고 생각하기 일쑤였고, 그들의 첫딸이 슈퍼-시스젠더-헤테로였으니 진이 더욱더 이상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전체를 두고 보면 진은 그렇게 유별난 타입이 아니었지만 현재의 사회 체제에 크게 불만 하나 없이 아무 남자나 잘 만나는 티피컬한 언니를 옆에 둔 탓에 집안에서 만큼은 이해하기 어려운 골칫덩이였다. 쟤는 결혼을 하려나 몰라. 엄마는 진의 신경을 본격적으로 긁고자 할 때면 꼭 그런 말을 꺼냈다. 진은 왜 부모가 임신 또는 데이트 폭력과 같은 위험에 지나치게 많이 노출된 첫째 딸보다 그저 아무와도 성애적인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아할 뿐인 둘째 딸을 걱정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진은 언니가 자신에게 왜 가장 먼저 임신 사실을 알렸는지 알 것도 같았다. 그것은 언니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진이 아는 언니의 남자친구 외에도 언니는 다른 한 명을 더 만나고 있다고 고해성사 하듯이 진에게 털어놓았다. 진은 언니의 남자-좋아함에 머리가 아팠다. 왜? 그 남자랑 죽고 못 살더니. 언니는 진의 반응에 눈치를 보면서도 이제 거의 멎어가는 울음을 뒤로하고 대답했다. 권태기였어. 진은 언니가 집에 데려온 탓에 몇 번 본 적 있는 권태기남의 얼굴을 속으로 떠올려 보았다. 언니의 남자-없이 못 삼 상태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말 할 거야? 진의 물음에는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었다. 언니는 고개를 저었다. 그 말의 뜻은 부모에게도 남자친구에게도, 그리고 비공식 애인에게도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리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언니는 중학생 시절 그랬던 것처럼 진을 꼭 껴안으며 내가 이런 말 너 아니면 누구한테 하겠어, 하고 한탄했다. 진은 그런 언니가 안쓰러우면서도 한심했다. 도대체 남자가 뭐 그렇게 좋다고. 도대체 섹스가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대한민국에서 낙태는 아직까지 특수 상황이 아닌 이상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고 회사원인 언니는 자체 휴강을 때릴 수 있는 진과 다르게 날이 밝자마자 자신의 기분이 어떻든 침대에서 일어나 출근할 준비를 해야만 했다. 무언가를 저질러 놓은 것은 언니였지만 언니가 진에게 입을 연 순간 진은 공모자 또는 가담자가 되어 언니가 저질러 놓은 일들을 수습해야만 했다. 진은 출근하는 언니의 마른 등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러고도 다음 달이면 또 남자친구를 사귀겠지. 진은 언니가 리스크가 큰 일들을 저지를 때마다 피곤함을 느꼈다. 자신이 결국 언니를 도와줄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은 언니를 위해서 약을 구해주고 병원을 알아봤다. 언니의 남자들 대신 언니와 함께 산부인과에 방문했다. 서먹했던 자매 사이는 강제로 가까워졌다가 이 모든 일들이 일단락 된 후 다시 어색해졌다. 언니는 진의 눈치를 보며 과도하게 잘 해주려고 노력하다가, 무덤덤한 진의 태도에 히스테리를 부리며 알아서 점점 진에게서 멀어졌다. 애초에 진은 언니와 자신이 한 배에서 같은 핏줄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닮지 않았다고 느꼈다. 자신이라면 생각도 하지 못할 일들을 언니는 당연하다는 듯이 해냈고, 언니라면 외로워 죽었을 삶의 방식을 진은 어린 나이부터 채택해 왔다. 진이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준생 시기에 접어들 무렵, 언니는 결혼할 사람이라며 이전 남자친구들과 다르게 조금 못생기고 숙맥인 것 같은 남자 하나를 집으로 데려왔다. 진은 이전에 비해 언니가 눈이 많이 낮아졌다고 생각했다. 거래처 직원이고 일 하다가 만난 그 남자는 언니보다 다섯 살이 많았고 서울에 전셋집이 하나 있다고 했다. 엄마는 이전 남자친구들에 비해 꽤 착실해 보이는 미래의 사위를 반겼고 결혼 날짜는 양가의 협의 끝에 별다른 마찰 없이 수월하게 잡혔다. 언니는 결혼 날짜가 확정되고 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 회사 앞으로 진을 불러냈다. 값비싼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코스 요리로 저녁을 사 주면서 언니는 진에게 비밀로 해야 해, 하고 거듭 반복해서 말했다. 네가 비밀 지켜 줄 거 알지만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거야. 알았지? 전부 비밀이야. 너밖에 모른단 말이야……. 진은 언니의 결혼 날짜가 잡힌 후부터 자신에게 너는 도대체 언제쯤 애인을 데리고 올 거냐며 성화인 엄마의 얼굴을 떠올렸다. 언니의 많은 비밀들은 진밖에 알지 못했다. 진은 언니의 고해소였고 상담실이었으며, 비밀 일기장이었다. 잔에 따라져 나오는 하우스 와인을 홀짝이며 진이 웃었다. 됐어. 삼겹살에 소주 사줬어도 한마디도 안 했을 거야. 진은 언니가 부끄러워 할 일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다. 언니의 문제는 피임도 제대로 안 하는 개자식들을 남자친구로 뒀었다는 사실뿐이었다. 진과 언니는 자매였고 두 사람은 그저 다른 지향점과 인생관을 가진 사람에 불과했다. 진이 말했다. 나도 언니가 있어서 좋아. 내가 이런 말을 또 누구한테 듣겠어. 그러니까 언니, 이번에는 행복해야 해. 알았지?
결혼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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