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정말 이럴 거니, 윤아? 그래도 가족 간에 정이 있지 그깟 700만원이 뭐가 대수라고……. 윤은 다 무너져가는 반지하 골방에서 침침한 눈을 번뜩이며 자신에게 소리치는 엄마가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윤에게도 그랬지만 윤의 오빠에게는 특히나 맹목적이었다. 엄마는 나이 들어 남는 것은 결국 남편도 친구도 아니고 자기 핏줄, 자기 자식밖에 없노라고 윤의 귀가 닳도록 말했지만 윤은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엄마, 그럼 그냥 그 새끼 저렇게 살게 둘 거야? 윤이 묻자 엄마가 입술을 꾹 다물며 대답했다. 너는 오빠한테 그 새끼가 다 뭐야. 그래도 네 오빠인데.
K차녀 이야기 - 윤편
윤의 아버지는 항상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좋게 말해야 자신감이었고 실제로는 허풍이나 허세에 가까운 그 중년 사내의 자만심은 집안을 간단하게 풍비박산 내놓았다. 이번에는 잘 될 거라니까? 꼭 술에 취한 것처럼 불그스름한 피부와 이마에 돋은 힘줄, 짧게 깎은 스포츠 머리에 칼라가 반대로 접힌 촌스러운 반팔 티셔츠. 아버지에 대한 윤의 기억은 이제 그 정도였다. 엄마는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 사람 감방 갈 줄 알았다. 윤은 엄마의 말을 들을 때마다 그럼 왜 나서서 사업을 벌이고 빚을 져 오는 아버지를 말리지 않았느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오빠는 아버지를 판에 그대로 복제해 옮겨 놓은 것 같은 사람이었다. 윤은 아버지가 빚 때문에 구속되어 범죄자로서 감옥에 구금 됐을 때도 오빠의 존재 때문에 아버지의 부재를 크게 느끼지 못했다. 그것은 의지가 된다거나 든든하다는 감각이라기보다는 피곤한 상대가 여전히 존재했기 때문에 느껴지는 피로의 연쇄에 가까웠다. 엄마는 늘 윤의 오빠만 감싸고 돌았다. 그것은 오빠가 사내자식이기 때문이라는 근본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엄마에게 남은 유일한 사람들 중 가장 크게 사고를 칠 만한 사람이 오빠이기 때문에 나온 방어기제에 지나지 않았다. 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엄마는 중고등학교 때부터 폭력이나 금전 문제를 일으키는 오빠를 싸고 돌면서도 그를 갱생시킬 시도 따위는 하지 않았다. 윤은 엄마가 시도도 하기 전에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남자애들은 원래 그래. 그 말은 용서와 동시에 어떤 껄끄러움을 가지고 있었다. 남자애들이 원래 그런 거랑 엄마랑 내가 그 피해를 고스란히 받는 게 무슨 연관이 있는데? 윤은 튀어나오는 질문을 속으로 삼키며 청소년기를 알 수 없는 외로움과 정서불안 속에서 보냈다. 엄마는 오빠에게는 제대로 화내지 못하면서 윤에게는 늘 날을 세웠다. 윤은 엄마를 이해했다. 엄마가 집안에서 유일하게 이길 수 있는 상대는 윤, 자신밖에 없었으므로.
윤의 오빠에게는 상종하지 못할 나쁜 버릇이 두 가지 있었다. 사실 그 외에도 많은 편이지만 가장 큰 것은 딱 두 개였다. 하나는 허언증인가 싶을 정도로 거짓말을 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거 거짓말 아니야? 하고 묻는 상대를 견디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윤의 오빠는 고등학교 졸업이 최종 학력인 윤과 다르게 실제로 대학 졸업자이긴 했으나 수도권에 위치한 유명 4년제 대학을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오빠는 항상 자신의 친구들에게 자신이 서울에 위치한 H대에 다닌다고 거짓말을 했다.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아버지가 사업을 하다 감옥에 들어가 반지하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일부러 오늘은 내가 한 턱 낸다며 몇 십 만원을 지불하는 경우는 허다했다. 오빠의 마지막 여자 친구는 모 기업에 재직 중이라는 그의 거짓말을 의심했다가 주먹으로 뺨을 맞아 이가 부러졌다. 폭력으로 고소를 당한 탓에 엄마는 그대로 오빠의 전 여자 친구를 찾아가 고개를 숙이고 집안 사정이 어렵다며 무릎을 꿇고 빌어야 했다. 오빠는 구치소에 갇힌 채로 엄마와 윤이 제발 한 번만 합의해 달라고 비는 동안 조용히 있었다. 결국 그녀들을 불쌍하게 여긴 전 여자 친구가 제시한 합의금은 700만원이었다. 엄마는 곧장 윤을 붙잡고 이렇게 말했다. 윤아, 너 예전에 적금 든 거 있지?
윤은 평생 일했다. 오빠나 아버지처럼 사업을 하거나 거짓말을 할 생각이 없었다. 윤은 그냥 하루하루 벌어서 먹고 살 만큼, 달에 정해진 돈이 들어오는 만큼, 그 정도에 만족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부모님 동의서를 들고 가 편의점에서 애매한 최저시급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하던 그녀는 고등학교 마지막 학기에 선생님으로부터 기술직을 소개받아 취직하는 것에 성공했다. 당시 윤의 오빠는 백수였기 때문에 엄마는 윤의 취직 소식을 그 누구보다 기뻐했다. 윤은 그 때가 엄마가 오빠를 처음으로 타박했던 때였으므로 명확히 그 장면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엄마는 누워있던 오빠의 등을 찰싹 치며 이렇게 말했다. 너는 네 여동생도 벌써 취업을 하는데 아직도 일을 못 구하니? 오빠는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쟤랑 나랑 같아? 원래 요즘은 고졸이 더 취업하기 쉬운 거 몰라? 엄마가 혀를 차고 윤은 말을 잃었다. 성적이 꽤 좋은 편이었던 윤이 대학에 가지 못하고 어려서부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졸업과 동시에 취업을 하게 된 것은 전부 아버지와 오빠의 탓이었다. 윤은 감옥에 간 아버지와 백수로 사는 아들을 대신해 혼자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식당 일을 다니는 엄마가 불쌍했다. 나는 속 썩이지 말아야지. 나는 엄마를 슬프게 하지 말아야지. 마치 주문처럼 윤은 어린시절부터 그렇게 스스로에게 세뇌를 걸었다. 집안일을 도와주고, 생계에 보탬이 되고, 받을 수 있었던 교육을 포기하고, 어린 시절을 노동에 희생하는 것. 윤은 이렇게 하면 엄마가 자신을 사랑해 줄 것 같았다. 오빠보다도 더.
그리고 지금에 와서 윤은 깨닫는 것이다. 엄마는 윤이 모은 돈을 오빠를 위해서 전부 뜯어냈다. 언젠가 오빠가 일자리가 생기고 시간이 지나면 네 돈, 그깟 700만원 어련히 갚지 않겠냐는 회유와 너 엄마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러냐는 협박, 아버지도 오빠도 둘 다 감옥에 가 버리면 네 인생도 끝장이라는 이야기……. 윤은 엄마가 불쌍해서 모은 돈에 정부 지원 대출을 받아 오빠의 합의금을 대 주었다. 오빠는 윤에게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었다. 오빠를 대신해서 윤의 엄마가 울었다. 고맙다, 윤아. 고마워. 그래, 가족끼리 돕고 살아야지. 그렇지? 윤은 가족들이 자신을 도와준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지만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가 일자리를 얻은 지 몇 개월이 지났음에도 윤은 700만원을 돌려받지 못했다. 대출금은 어떻게든 상환했지만 적금을 들어둔 것이 전부 빠져 나간 데다가 보험까지 하나 해지한 탓에 윤은 어떻게든 이 700만원을 돌려 받고 싶었다. 오빠나 엄마에게 윤이 자주 연락을 하게 된 것은 확실하게 돈 때문이 맞았다. 윤에게 그들은 가족인 동시에 채무자였고, 공증은 쓰지 않았지만 윤은 그들에게 돈을 돌려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오빠는 윤이 연락을 할 때마다 고의적으로 윤의 연락을 무시하거나 받더라도 화를 내고 윽박을 지름으로써 이 문제로부터 회피하고 싶어했다. 그의 논리는 이랬다. 내가 언제 해 달라고 했어? 엄마한테 가서 받아. 진짜 짜증나게. 윤은 가끔 오빠를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자신이 아버지와 같은 처지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니었으므로 꾹 눌러 참았다. 엄마는 오빠의 태도에 기가 막혀 하면서도 내심 돈을 갚으라고 말하는 윤을 매정하게 생각했다. 너 정말 이럴 거니, 윤아? 그래도 가족 간에 정이 있지 그깟 700만원이 뭐가 대수라고……. 대수였다. 정말로 대수였다. 윤은 무너져 가는 마음과 지친 정신을 추스르며 집을 나섰다. 반지하를 벗어나자 가을의 날카로운 햇빛이 등을 찔렀고 금세 쌀쌀해진 바람이 얇은 겉옷 사이를 억지로 파고들었다. 윤은 울지 않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엄마는 윤을 쫓아 나오지 않았다. 윤은 자신이 다음 달을 버티기 위해 얼마를 아껴야 하는지를 생각하며 앞으로, 계속해서 앞으로만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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