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살의 나는 내가 직장인 따위는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안정적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매일 출퇴근만 반복하는 삶이 자유로운 성향의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때의 나는 내가 여행작가나 잡지 칼럼니스트 같은 글만 조금 끄적여 벌어 먹고 살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따지자면 프리랜서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런 나의 철없음과 미래 계획 없음은 대학에 입학하고 1학년 첫 학기를 보내던 중에 모두 깨져버렸다. 적당히 행복하게 살기 위한 필수 조건은 돈, 오로지 돈이었다. 그런데 프리랜서가 돈을 벌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 대학 강의에 출강하는 모든 강사들이 저렇게 투잡을 뛰는 것은 역설적이었다. 시기와 재난에 크게 영향받지 않고 꾸준히 달마다 들어오는 일정한 월급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나가는 일은 어린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자유로운 삶에는 책임이 따랐고 일하지 않는 자에게 돈을 줄 만큼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대학 생활 내내 나는 오로지 취직에 매달렸다. 예체능 계열로 진학해 놓고서는 사무직만을 찾아 하이에나처럼 헤맸다. 나는 정신을 대단히 일찍 차린 케이스였다. 1학년 첫 학기부터 취직해야지, 결정을 해서 4학년 막학기를 마치기 전에 취업계를 내고 중소기업에 입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K중소기업 생존기
물론 나와 다른 길을 선택한 과 동기 또는 여전히 예술 쪽으로 노력하고 있는 내 친구들을 비난하고자 하는 마음은 전혀 없다. 그들은 그들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비록 부모로부터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면 공무원이나 해, 라는 강요 어린 압박을 N년째 받고 있는 친구들을 보면 차라리 공모전 같은 거에 매달리지 말고 계약직이라도 일이나 시작해 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기는 하지만 그들의 인생과 나의 인생은 별개인 것이다. 어쩌면 저렇게 최선을 다해 예술에 분투하는 친구들이야말로 먼 미래에, 또는 우리의 사후에 빈센트 반 고흐처럼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될 지도 모른다. 내가 다달이 들어오는 안정적인 수입과 자본주의 사회의 훌륭한 노예로서의 삶을 기꺼이 선택했듯이 내 동기들, 또는 친구들도 그들만의 삶의 방식을 채택한 것이라고 믿는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K중소기업에 입사했다. 스타트업에 대한 괴담에 가까운 악평을 너무 오랫동안 들어왔고, 죽어도 전공을 살릴 수 있다는 출판사에는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최대한 내 전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어느 정도 몸집은 있고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온 회사를 대학 시절 내내 찾아다녔다. 솔직한 심정으로 괜찮은 공기업에서 인턴도 몇 번 해 보았고 교환학생까지 다녀온 내가 대학 전공 때문에 매번 문예창작과가 뭐 하는 과예요? 라는 질문을 받고 면접 내내 웃기만 하다 나오는 일이 부당하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어쩔 수 있겠나. 복수전공을 경제학과나 컴퓨터공학과로 하지 않은 내 잘못이었다. 연봉 책정을 할 때도 본 전공이 발을 잡았다. 우리가 원고를 쓰기는 하지만 창작은 아닌데, 가 가장 큰 이유였다. 나는 문창과를 지망하는 수많은 입시생들에게 소리 쳐 주고 싶었다. 미래에 취직할 생각이 1할이라도 있으면 절대로 문창과 들어오지 말라고. 수도권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서도 썩 좋은 취급은 아니었던 탓이다. 게다가 대학 수업 내내 글 쓰고 작품 합평이나 할 줄 알았지 본격적인 사무 업무는 결국 처음부터 배워야 했으므로 모든 게 혼란스럽고 복잡하기만 했다. 다행스러운 건 내 첫 사수가 무척이나 좋은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신입으로 들어간 지 이틀 째부터 일정 조율을 하는 전화 업무에 떨어졌고 사수는 디자인은 잘 못한다는 내 말을 전적으로 반영하여 내게 최대한 포토샵을 쓸 일이 없는 일들을 배당해 주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꽤 이야기는 희망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중소기업이라는 것은 대기업처럼 그렇게 체계가 정해져 있는 곳이 아니고 하는 업무도 딱 나누어 떨어지는 곳이 아니었다. 회사에 입사만 하면 그래도 삶이 좀 안정적일 수 있을 줄 알았던 나는 업무 하나가 익숙해지면 계속해서 새로운 업무를 받아야만 했고 종래에는 책상에 전화기가 세 대 놓이는 상태에 도달했다. 그리고서는 행정 업무까지 도맡게 된 나에게 팀장은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디자인 업무는 안 시키잖아요, 우리가. 인턴 급여 서류를 전자 결제가 안 돼 수기로 작성하면서 나는 어이가 없었다. 다음 해가 오기 전에 꼭 포토샵 자격증을 따야겠다는 생각만이 강렬하게 들었다. 디자인 그게 뭐라고 이렇게 많은 일이 쏟아진단 말인가?
그러나 나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입사한 지 몇 달 되지 않아서 나의 사수가 기다렸다는 듯이 회사를 그만 둔 탓이었다. 사수는 야간으로 다니던 대학원을 주간으로 다니고 싶다는 이유를 변명처럼 대며 끊임없이 자신을 잡는 상사들을 쳐냈다. 사수가 회사에 남을 일이 없어 보이자 상사들은 일반 팀원들에게로 그 눈길을 돌려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뫄뫄 씨는 오래 있어. 요즘 사람들처럼 1년 채우고 나가고 그러지 말고. 그런 건 경력도 안 돼. 어쩌구 저쩌구 온갖 말을 그럴듯하게 하기는 했으나 결국 자기들이 몇 번을 잡아도 굳건하게 회사를 나가겠노라 주장하는 사수에 대한 지능적인 뒷담화에 불과했다. 나는 그렇게 일을 다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채 사수가 하던 일까지 인수인계를 받고 업무의 지옥으로 떨어졌다. 다행스러운 일은 내가 일처리가 빠른 편이고 요령을 금방 익힌다는 점이었고, 그래서 불행한 일은 내 아래로 새로운 직원이 셋이나 더 들어올 동안 팀장이라는 사람이 일을 내게만 분장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불평불만을 쉽게 할 수는 없었다. 이 회사에 가장 오래 있었다는 일반 팀원이 하는 업무량에 비하면 내 업무량은 발톱의 때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중소기업이란 이런 뜻이다. 대기업처럼 업무 체계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고 팀원들 사이에서는 알 수 없는 알력다툼이 존재하는 가운데 팀장급 인사들은 팀원들에게 ‘가족같은 분위기’를 원하면서 월급은 중소로 준다는 뜻. 누군가 그랬다. 어차피 노비로 일할 것이면 대감집 노비로 들어가라고. 그러나 어디 대감집 노비로 들어가기가 쉽던가. 대한민국과 전 세계에 전염병이 창궐하여 모두가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고 있을 때에도 나는 앉을 자리 없는 2호선에 몸을 싣고 확진자가 나오든 말든 계속해서 출근을 해야 했다. 우리 회사 건물에 의심 환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안내가 나온 뒤 딱 이틀, 고작 2일이 내가 재택근무를 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재택근무가 좋았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출퇴근 지하철에 몸을 싣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는 매우 좋았으나 아침부터 팀장의 대면하지 않고서는 업무를 주기 힘들어서 괴롭다 라는 전화에 시달려야 했으므로 썩 즐겁지만도 않았다고 해 두겠다. 회사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마스크를 나눠 주었다. 전염병이고 나발이고 금보다 귀한 마스크를 줄 테니 어서 나와서 일하라는 무언의 메시지였다. 목숨을 건 출퇴근이 이어지는 동안 상사는 이 전염병에 누구라도 팀원이 감염 돼 오면 최소 징계라는 식의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신고도 못하게 아주 교묘한 말놀림이 아닐 수 없었다. 사회생활을 오래 하면 저렇게 은근하게 사람 눈치 주는 스킬만 늘어나는구나 싶어 감탄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 전염병이 창궐하기 전 나는 부처님 오신 날과 근로자의 날을 낀 이 2020년의 얼마 안 되는 연휴에 연차를 쓸 예정에 있었다. 무척 눈치가 보이는 일이었지만 오랜 지인들과 베트남 여행을 약속했기에 1월 말부터 팀장에게 은근히 내가 이틀을 쉬게 될 것이라는 걸 몇 달 동안 어필해 두었다. 결국 전염병으로 인해 베트남 행을 불가능하게 되었지만, 이미 휴가 신청서는 제출해서 경영지원팀을 통과한 뒤였으므로 나는 오랜 노력 끝에 이틀의 휴가를 보장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팀장은 내가 휴가를 쓰는 것을 상당히 고까워했고 결국 내 휴가 전날 퇴근 5분 전에 내게 파일을 보내면서 곧 휴가가니까 이것까지만 일 더 하고 가라, 라는 망언을 하지 않겠는가? 덕분에 그날 나는 평소보다 늦게 퇴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야근 수당도 주지 않으면서 억울한 처사였으나 이틀을 내리 쉬기 위해 감내해야 할 희생이기도 했다. 이 글을 읽는 몇 사람들은 이런 일들이 어떻게 21세기에 일어날 수 있으며 부당한 일에 왜 맞서지 않느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정도는 K중소기업에서 부당한 일도 아니며 우리 회사는 놀랍게도 중소기업 분류 중에서는 잡코리아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만큼 괜찮은 회사라는 것이 포인트다. 더한 블랙기업도 이 세상 도처에 널려 있다는 뜻이다. 상사의 인신 공격과 성희롱 등을 참지 않고 신고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으나, 결국 생계가 급한 놈이 굽히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세상인 것에는 변함이 없다. 월세며 공과금, 보험금이나 통신비 같은 것은 안정적인 수입이 없으면 전부 빚더미나 다름 없고 모든 대우를 받으면서 즐겁게 일할 수 있는 회사라는 건 적어도 현실 세상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굴지의 대기업에 들어간 내 지인이 2년을 버티지 못하고 폐인이 되어 나오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그러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세상의 모든 직장인들아, 그냥 열심히 살아라. 요즘은 취업도 이직도 어렵기 짝이 없다.
이 이야기를 끝내기 전에 몇 가지 말을 더 하고자 한다. 본인이 다니고 있는 회사가 중소기업이고 입사한 지 6개월이 지나지 않았다면 부디 내일채움공제에 대해 알아보길 바란다. 회사가 같이 신청을 해 주어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2년 근속과 한 달 12만 5천원으로 2년 뒤에는 1600만원으로 돌려 받을 수 있는 좋은 제도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제도는 딱 한 번만 신청할 수 있으니 신중하게 고려하도록 하자. 이상 근로자의 날을 모두 잘 보내길 바란다.
'Personal > 단편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K차녀 이야기 (윤) (0) | 2020.10.07 |
---|---|
K차녀 이야기 (혜) (0) | 2020.09.22 |
K장녀 이야기 (주) (0) | 2020.01.23 |
K장녀 이야기 (유) (10) | 2020.01.21 |
K장녀 이야기 (경) (0) | 2020.0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