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이 이화여자대학교에 합격했을 때 주변의 반응은 명확하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하나는 여대 간다니 남자 못 만나서 큰일이네, 였고 다른 하나는 그래도 여대 나온 여자를 사회에선 더 쳐 주니까 다행이다, 라는 것이었다. 두 개로 선을 그어 버리듯 나뉜 반응 속에서도 공통된 의견 한 가지는 명확했다. 그래도 여대 공대는 쉽지 않겠어? 여자애들 수학 못하잖아.
K장녀 이야기 – 경 편
이화여자대학교, 여대 중에서는 탑 오브 탑이라고 할 수 있는 그 학교에 합격을 하고서도 당시 고3이었던 경의 기분은 썩 좋지 못했다. 가족들은 물론이고 주변 친구들까지 은근하게 경의 합격을 깎아내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화여대 애들이 서울대 애들하고 제일 많이 결혼하지? 라고 묻는 친척 어른의 면상을 감자 강판에 갈아 버리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있었으므로 경은 그냥 희미한 미소만 지었을 뿐이었다. 서성한보다 수준 높다는 이대를 붙었는데 – 애초에 왜 대학 줄 세우기를 그렇게 좋아하면서 라인에 이대를 빼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 축하보다는 걱정과 염려를 더 받는 것이 이상했다. 왜 남자가 없어서 안된 일이란 말인가? 경은 마치 자신이 과 CC를 하지 못하면 죽는 세계관에 떨어진 것 같았다. 입학과 동시에 신명나게 미팅에 나가 못해도 연고대 남자를 하나 사귀어야만 이 여대에 대한 편견을 깰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 애한테 뭐라고 하지 마요. 요즘 여대가 얼마나 좋은데.
전을 부치던 경의 엄마가 친척 어른들로부터 경을 감싸고돌았다. 이대 정도면 잘 갔지, 뭐. 잘 간 정도가 아니라 솔직히 친척들 사이에서 제일의 학벌이었다. 경은 엄마를 도와 일정한 간격으로 썬 애호박에 튀김가루와 계란 물을 번갈아 입히면서 알게 모르게 슬쩍 친척 어른들을 흘겨보았다. 경의 쌍둥이 남동생 둘 중 하나는 아직도 제 방에서 코를 골며 자는 중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다른 친척 남동생과 함께 거실에 있는 컴퓨터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경의 엄마는 물론 경과 경의 고모들까지 달려 들어 제사 음식을 차리는 데도 손이 모자랐다. 엄마가 경을 향해 말했다. 너는 애가 그렇게 손이 야무지지 못해서 어떻게 시집 가려고 그러니? 경은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거실에서 게임 중인 남동생을 불렀다. 남동생이 왜? 하고 대답도 하기 전에 엄마의 매서운 손이 경의 등짝을 퍽 쳤다. 네 동생은 왜 부르니? 남자애들은 부엌에 들어오면 안 돼. 고추 떨어져. 경은 엄마의 그 말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고추가 부엌에 들어오는 것만으로 떨어지다니. 정말이지 남자의 생식기관은 개복치보다도 더 못한 존재인 것이 아닌가? 반박이라도 할 심산으로 입을 놀리려 했지만 고모와 엄마의 시선이 모두 경에게 닿아 있었다. 자신들이 정한 세계에 반기를 들지 말라는 그 악의없는 검은 눈. 경은 그 시선에 치를 떨면서도 얌전히 전을 부쳤다. 여대 간다고 옆에서 살살 성질을 긁어대던 친척 어른이 경의 그 모습을 보고 그래, 여대 애들이 참해서 결혼은 잘 해, 하고 한 마디 거들었다. 경은 좆같다고 생각했다. 부엌에 들어오기만 해도 떨어져 버리는 개복치 같은, 좆.
경의 대학 생활은 다른 고교 동창들에 비해 대단히 평안했다. 너는 연애 같은 거 안 해? 하고 묻는 친구들 사이에서 경은 학점 따느라 바빠, 아르바이트 해야 해, 하는 말로 교묘하게 빠져나갔다. 사실 그냥 게임 하느라 바빴다. 과 CC를 하고 헤어져 남자는 군대 가고 자기는 휴학한 친구부터 시작해서 군대 다녀오는 걸 기다려 줬더니 새내기랑 바람 난 남자 드잡이를 하겠다는 친구까지 다채로운 연애사를 들을 때마다 경은 제 잘난 학벌과 괜찮은 외모의 친구들이 왜 굳이 그런 돼 먹지 못한 남자를 사귀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결혼이라도 하면 또 남의 집 가서 전이나 부치고 있을 것이 아닌가? 경은 그럴 시간에 온라인 게임의 던전이나 도는 것이 인생에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경아, 또 게임 하니? 방문 너머에서 엄마가 소리쳤다. 나와서 음식물 쓰레기 좀 버려라! 경은 한창 보스 몹에게 딜을 넣고 있던 중이었으므로 엄마의 말에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동생 시켜! 걔네 다 집에 있잖아! 경의 대답으로부터 1분 정도가 흘렀을까, 닫혀있던 방문이 걸쇠 소리를 덜컥 내며 열렸다. 화난 표정의 엄마가 기세등등하게 게임을 하는 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네가 어? 사내자식도 아니고 무슨 하루 종일 게임을 해, 게임을. 다른 애들은 이 좋은 날에 다 남자친구랑 데이트 하러 나간다던데 넌 도대체 뭐가 모자라서 연애를 안 하니? 경은 결국 파티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게임을 멈춘 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와야 했다. 도대체 왜 남동생들에게는 그런 일을 시키지 않느냐고 물을 때마다 엄마는 경에게 일관적인 대답을 뱉었다. 왜기는. 남자애들이 부엌 일 하면 못 써.
같은 게임을 몇 달간 함께 한 공대원들끼리 오프라인에서 만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날짜와 시간, 장소가 잡히고 나자 경도 오프라인 모임에 참여 의사를 밝혔다. 경은 그 전까지 오프라인 모임에 나간 적이 없었다. 공대원들 중 하나가 경의 닉네임을 대며 경을 처음 보는 것이라고 정말 기대된다는 말을 남겼다. 기대 사유는 디스코드로 들은 경의 목소리가 사근사근했다는 것이었다. 약속 장소인 신촌에서 경은 공대원들을 만났다. 사람들은 확실히 온라인 오프라인 다른 모양이라, 말과 행동이 온라인과 엇비슷한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오프라인에서는 별 말 없이 조용한 편이었다. 검은 사각 뿔테 안경을 낀 20대 후반의 남자가 이 오프라인 모임을 주도하고 있었는데 그는 다 같이 보드게임만 한 판만 하고 자리를 뜨려던 경을 붙잡아 저녁 술자리까지 함께 하자고 했다. 다른 여성 멤버들도 있었기 때문에 경은 의심 없이 그 술자리에 함께 했다. 미리 예약해 놓은 고깃집은 사람들로 붐볐고 매캐한 연기 사이로 탄 고기 냄새가 풍겼다. 인원 수에 비해 자기 잘 마신다는 가오를 내비치는 남자들 덕분에 정량을 넘게 시킨 녹색병과 갈색병이 테이블 위로 너저분하게 세팅 되었다. 술이 들어갈수록 남자들의 목소리가 커지는 동안 여자들이 하나둘 자리를 이탈해 나가기 시작했다. 경도 다른 여성 멤버와 함께 이 술자리를 떠날 생각이었지만 예의 그 사각 뿔테남이 경을 붙잡았다. 이대생이시죠? 경은 제게 대뜸 학력을 물어보는 그가 불쾌했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아셨어요? 하고 묻자 뿔테남이 씩 웃으면서 대답했다. 경 씨같은 분들은… 어쩐지 그런 느낌이 있거든요. 여대 다니실 것 같다고나 할까. 왜 있잖아요? 여대 느낌. 경은 정말로 불쾌해졌지만 분위기를 해칠까 봐 정색을 하거나 화를 내는 대신 그냥 웃었다. 하하, 정말 재밌네요. 경은 사실 그가 보드게임 카페에서 신촌 지역 대학생 할인을 받기 위해 내민 자신의 학생증을 봤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오프라인 모임 이후로 경은 게임 내에서 사각 뿔테남을 차단했다. 그가 공대의 중요 직책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파티도 탈퇴하게 되었다. 게임 내에서 그 뿔테남이 경을 비방하고 다닌다는 말이 귀에 들렸지만 경은 그냥 그와 더 상종하고 싶지 않았다. 같이 게임을 하는 다른 여성 멤버가 혹시 그가 성희롱이라도 했냐며 자신에게 쪽지를 남겼지만 경은 그런 거 아니에요, 하고 답장만 하고 말 뿐이었다. 종종 게임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서 보는 SNS나 공식 사이트 게시판에서 그의 닉네임을 볼 때마다 경은 기분이 좆같아졌다. 그가 말하는 여대 느낌이 무엇인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가족 대 명절이 찾아왔다. 제사 음식 대신 명절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 고모와 엄마, 그리고 경이 한 자리에 앉았다. 기름 두른 팬을 한가운데 두고 여자들이 튀김가루와 계란 물에 애호박이며 고구마 같은 것을 적셔 부치는 동안 남자들은 거실에 앉아 화투를 치거나 TV를 보고 있었다. 경의 남동생 중 하나처럼 방에 들어가 잠을 자는 경우도 있었다. 기름 냄새에 입맛이 뚝 떨어진 경은 전을 부치다 말고 힘들다는 소리는 하면서 도와달라고는 절대 말하지 않는 고모와 엄마에게 말했다. 시대가 어느 때인데 왜 여자들만 전을 부쳐? 엄마는 경이 무슨 금칙어를 말하기라도 한 마냥 혀를 찼다. 얘가 또 왜 이래? 하는 태도였다. 옆에서 경이 여대 가는 것에 대해 가타부타 말을 얹었던 친척 어른이 다가 와 경이 여대에 가더니 어떤 ‘사상’에 물든 거라고 지껄였다. 사상이요? 경이 묻자 친척 어른이 띄엄띄엄 말을 뱉었다. 그 왜, 있잖아. 요즘 여자애들 결혼 안 하고 애 안 낳고 자기들만 힘들다고 징징 거리는 거. 경은 자신이 그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이전처럼 그냥 웃고 넘기면 될 일이었다. 아이, 저는 안 그래요, 하고 애교 섞인 투로 대충 한 번 둘러대면 더 좋고. 엄마가 경에게 잘 대처하라는 식의 눈빛을 쏘아 보냈다. 경은 제 밀가루와 계란물에 젖은 손과 기름 팬에 달궈져 뜨거운 부침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모든 게 너무 좆같아서 참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내가 내 학교 좋다는 데 시비 거는 인간이 왜 이렇게 많단 말인가? 경은 부침개를 테이블 위로 탁 소리가 나게 내려두고 친척 어른을 향해 쏘아 붙였다. 여대 다녀 보셨어요? 아주 전문가시네. 거실에서 TV를 보던 남자 친척들까지 경을 돌아보았다. 경은 아차 싶었지만 이제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왕 물 잔을 엎지른 것 경은 그냥 막 나가기로 했다. 진짜 지랄이야. 전 부치는 거 한 번을 안 도와줘 놓고. 경의 말에 고모가 어머, 하고 제 입가를 가렸다. 경은 그대로 핸드폰과 지갑만 챙겨 집에서 나와 버렸다. 엄마가 뒤에서 경의 이름을 소리 쳐 부르는 것이 들렸지만 무시했다.
밤이 되고 나서야 경은 집으로 돌아갔다. 엄마 대신 아빠가 한껏 분위기를 잡으며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아빠는 경의 이름 세 글자를 똑바로 부르며 네가 뭘 잘못했는지 아느냐고, 와서 자기 앞에 똑바로 서라고 했다. 경은 좆같음이 사라지지 않은 채로 여전히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를 돌이켜 보았다. 유교적 관점에서 보면 자신의 태도는 맞아 죽어야 할 쌍년임에 틀림없었지만 21세기 여대생의 관점에서 보자면 맞아 죽어야 할 것들은 자신이 아니라 옆에서 깐족거리고 가족 제사에 도움 하나 안 되면서 부친 전이나 야금야금 주워 먹는 제 남자 친척들이었다. 아빠가 경에게 호통을 치며 말했다. 이래서 내가 여자애들을 여대에 안 보내려고 하는 거야. 생각이라는 게, 어? 생각이라는 게 없어지고 사회화가 안 되잖아. 우리 때는 말이다… 주절거리며 이어지는 잔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경은 생각했다. 꼭 성공해서 독립해야지. 꼭 성공해서 나중에 인터뷰 따면 여대 나온 덕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해야지. 경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아빠의 호통과 엄마의 그래, 맞아, 너는 여자애가 돼서, 등등의 추임새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남동생들이 방에서 거실을 힐끔거리며 경과 부모님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경은 그 와중에도 하루 종일 전을 부치고도 아빠에게 맞장구를 쳐 주는 엄마가 불쌍했다. 그리고 이런 동정심을 느끼는 자신이 정말 미쳤다고 생각했다. 경은 자신이 독립해서 나갈 수 있을 시기를 속으로 세어 보았다. 적어도 설날 추석 제사만 열 손가락은 더 넘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좆같은 명절은 계속해서 돌아올 테였다. 경은 그냥 참기로 했다. 참고, 또 참아서 남자들이 부엌에 발을 잘 못 들여 좆이 다 떨어져 버릴 때까지 버티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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