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위천의 경험상 크리스마스는 그렇게 의미 있는 날이 아니었다. 섹스하기에 좋은 날이긴 했다. 예수 생일을 기념해서 발정난 커플들이 기열차게 모텔 방을 잡아 댔으니까. 제 생년월일을 모르는 위위천도 막연하게 자신이 9월이나 10월 생일 거라고 생각했다. 무책임한 섹스로 낳은 아이라면 크리스마스 시즌이야말로 대목 아니겠는가?
그러나 모두가 아는 예수 생일과 달리 위위천의 생일은 그 자신조차 잘 몰랐다. 뙤약볕과 생선 썩은 내가 지독한 수산 시장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던 아기. 그 시절에는 그런 일이 꽤 비일비재했다. 탯줄을 제대로 자르지 않아도 다들 친모를 찾을 수 없을 거라고 믿었으니까.
‘여름’이라는 단서만 가지고 생일을 추측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어쩌면 위위천의 생모조차 그가 몇 월 생인지 이제는 기억하지 못할 터였다. 그는 이제 마흔두 살이었고, 그의 모친도 최소 예순은 넘었을 터였다.
덕분에 위위천은 존재하지도 않는 생일보다 크리스마스에 케이크를 더 많이 먹었다. 그가 단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천운이었다. 유년기 내내 부모 없는 아이들로 북적거리는 위탁 가정 안에서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두고 경쟁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빵 시트가 유독 두껍고 하얀 생크림 위에 빨간 딸기가 딱 하나 올라가 있던 조각 케이크. 어린 위위천은 그 모형 같은 자태가 몇 초 만에 우그러지는 것을 안타깝게 지켜보곤 했다. 불쌍해라! 고작 저 한 조각을 나눠 먹는 걸로는 아무도 행복해지지 못할 텐데.
위위천은 아이들 중 누구라도 저보다는 조금 더 즐거워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꺼이 제몫의 케이크를 양보했다. 그는 그런 것에 욕심이 없었다. 기념할 만한 하루? 얼굴도 모르는 성인을 위해 캐롤을 부르는 아이들? 위위천은 그런 것들이야말로 잘 만들어진 케이크 같다고 생각했다.
포크끼리 서로 부딪히며 접시 긁는 소리가 요란했다. 위위천은 서로 먹겠다고 달려드는 또래 애들 뒤에 선 채로 예수를 동정했다.
당신 생일은 완전히 이용당했어요. 사람들은 캐롤을 듣기 위해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말하고, 1년에 한 번이라도 더 특별한 날을 만들어보겠답시고 크리스마스를 찬양하는 거라고요. 심지어 당신 생일은 모든 사람이 행복하지도 않죠. 누군가는 일을 나가고, 누군가는 이런 날에도 죽을 테니까….
그러니까 내 말은, 크리스마스를 특별하게 생각하면서 고작 케이크 하나에 저렇게 개미 떼처럼 달려드는 사람들이 안됐다는 거예요. 그 달콤한 것이 순식간에 난도질당한 꼴을 봐요. 기껏 아름답게 형태가 잡혔는데 삽시간에 무너져야 한다니.
크리스마스 쇼트 케이크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케이크 예약을 못 해서.”
계절은 겨울, 텔레비전에서는 다들 들뜬 얼굴로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 거라고 떠들었다. 잡동사니를 치운 뒤로 꽤 널널해진 거실에 작은 전나무 트리를 세운 위위천과 레비는 코스트코에서 대량 구매한 (위위천이 홀린 듯이 쓸어 담았다.) 오너먼트를 가지 위에 빼곡하게 장식하는 중이었다.
그 과정에서 위위천은 크리스마스 케이크의 부재를 깨달았다. 홀리몰리, 맙소사. 내가 안 먹는다고 레비도 안 먹을 거라는 보장이 없는데 케이크를 완전히 깜빡하고 말았잖아. 한 번이라도 물어봤어야 했는데!
정말이지 동거인을 배려하지 않는 이기적인 행태였다. 위위천은 나무가 불쌍해질 정도로 오너먼트를 달다 말고 스스로의 이마를 쳤다.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에 크리스마스 케이크 구하기? 제과점을 찾으려면 차를 타고 15분은 나가야 하는 도시에서? 여기가 미국 뉴욕이라면 모를까….
차라리 직접 만들어 먹는 게 빠를 수도 있었다. 위위천은 코스트코 베이커리 통로를 빙 둘러 서 있던 케이크 사냥꾼들을 떠올렸다. 그날은 이브도 아니고 23일이었는데. 크리스마스에 미친 인간들은 케이크를 먹지 못해 죽은 귀신이라도 붙은 것처럼 그런 것들에 연연했다.
그 당시만 해도 위위천은 크리스마스에 별 의미를 다 가져다 붙이는 사람들을 조금 불쌍하게 생각했다. 그게 대체 뭐라고. 당신은 예수 얼굴을 아나요? 나는 모르는데…. 그리고 그대로 완전히 크리스마스 케이크에 대해서 잊어 버렸다. 자기가 안 먹으니 레비도 안 먹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역지사지가 안 되는 걸 보면 그는 꾸준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저기, 나무가 쓰러질 것 같아요.”
“아니에요. 전나무는 견딜 수 있어요.”
“…….”
“좋아요. 알겠어요. 장식 몇 개는 떼어낼게요. 하지만 전 빨간 등 장식이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
“없어도 돼요. 다 떼어내죠.”
“저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위위천은 기껏 달아둔 오너먼트 몇 개를 주섬주섬 떼어냈다. 레비는 괜찮으니 그냥 두라고 했지만, 자신이 보기에도 전나무가 곧 죽을 것 같았다. 줄 전구를 달아 빛까지 켤 거라면 전나무를 과잉 오너먼트 형에서 구해주는 게 옳았다.
손재주 좋게 매듭 지었던 오너먼트 끝을 풀어내며, 위위천은 다시 크리스마스 케이크에 대해 생각했다. 굳이 케이크를 먹어야 할까? 생각해 보면 두 사람뿐인데 홀 케이크를 사오는 것도 낭비였다. 레비 생일도 아니고 굳이 예수 생일에? 1월 16일에 더 좋은 케이크를 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또 케이크 없는 크리스마스는 너무 낭만이 없어 보였다. 위위천은 저를 매몰차게 걷어찼던 78번째 (62번째일 수도 있다.) 애인을 떠올렸다. 저보다 두 살 어렸던 (어쩌면 네 살 어렸던 것도 같다.) 그 여자는 위위천이 기념일을 너무 대충 챙긴다는 이유로 그에게 이별을 선고했다.
사실 기념일을 대충 챙긴다는 건 어느 정도 변명이었다. 위위천은 그래도 기본은 하는 남자였으니까.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크리스마스 이벤트를 꾸리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고, 케이크를 예약하는 세심함은 없어도 크리스마스 특별 섹스 같은 건 기깔나게 했다. 요구하지 않아도 기념일이라고 들러붙는 데엔 천재적이었단 소리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까지 박는 것도 이벤트라면 이벤트 아닌가? 하지만 그의 78번째 (다시 생각해 보니 89번째일지도….) 애인은 ‘넌 내 몸만 보고 만나?’라며 기어코 위위천을 몰아세웠다. 이럴 수가. 케이크 좀 안 챙겼다고 그런 말을 하다니. 위위천은 그 당시엔 그 사람을 정말로 사랑했다. 그 사람의 몸이 물리적으로 가장 가까워서 제일 많이 사랑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뼈 아픈 이별 경험을 가지고도 위위천은 크리스마스 케이크 구매에 대한 의식이 없었다.
그간 차려면 차라! 라는 마음으로 대충 살아온 영향이 컸다. 거기다 그는 어린 시절에도 쇼트 케이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의 대명사, 딸기 생크림 케이크… 생각만 해도 속이 느끼했다. 게다가 동물성 생크림 사용은 환경 오염의 주범이었다. 위위천은 사람은 죽여도 동물성 생크림 과다 사용은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거기다 단 걸 좋아하지 않는 성향 탓에 그는 자기 돈 주고 케이크를 살 일이 없었다. 누가 권유해도 포크로 한 번 떠 먹고 마는 게 전부였다. 예쁘게 만든 케이크일수록 위위천은 그걸 포크로 헤집는데 어려움을 느꼈다. 내가 굳이 이걸 먹어야 할까? 나보다 이걸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데도? 이런 어중간한 마음으로 케이크에 손을 대도 되는 걸까? 정말 이상한 고민하기의 달인이었다.
특별한 날이 지나 남은 케이크가 음식물 쓰레기로 분류되는 것도 별로 유쾌한 광경은 아니었다. 위위천은 사람들이 대충 패대기 친 크림 조각의 산을 보면 드물게 기분이 나빠졌다. 특별함이 쓰레기로 변모한 모양새를 아주 가까이서 직관한 기분이었으므로.
“케이크가 꼭 있어야 할까요?”
“지금은 사러 가기 어려울 텐데.”
“시내로 나가면 뭐라도 팔지 않을까 싶어서.”
“전 괜찮아요.”
“정말요?”
“네.”
레비는 위위천의 구 애인과 달리 딱히 케이크에 대한 집착을 드러내지 않았다.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본인 생일이었더라도 케이크에 연연하지 않았을 것 같은 초연한 낯이었다.
어차피 두 사람 다 크리스마스 파티에 익숙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트리를 세우고 오너먼트를 다는 과정조차 우당탕탕이었으니까. 심지어 위위천은 이 한약방에 크리스마스 트리를 처음 달아 봤다. 그는 지난 세월 동안 크리스마스를 '섹스하는 날'쯤으로 생각해 왔던 것이다.
“크리스마스까지 다섯 시간은 남았는데….”
첫 크리스마스 트리, 과도한 오너먼트 장식, 예수 생일이랍시고 자기 생일처럼 기뻐하는 사람들과 온갖 곳에서 들리는 캐롤….
그런 것들을 보고 있으니 위위천은 위기감이 들었다. 뭐라도 사 와야 할 것 같았다. 마침 레비가 준비 중인 칠면조 요리가 완성 되려면 두 시간은 더 있어야 했다.
“저 잠깐만 나갔다 올게요.”
“케이크 사러? 그러면 같이 가요.”
“케이크만 사서 돌아올 거예요.”
“…….”
“30분 내로 돌아올게요.”
위위천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겉옷을 챙겨 입었다. 자기 손으로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사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사람 일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는 거였다.
“정말 매진?”
“가짜 매진이 있나, 그럼?”
“정말 하나도 안 남았다고요?”
“이보쇼, 여기가 대도시인 줄 아나 본데….”
위위천은 마지막으로 방문한 제과점 주인에게 총을 겨눌지 말지 잠깐 고민했다. 총을 겨누고 케이크를 뜯어내는 거야말로 가장 마피아다운 행위가 아닌가. 그러나 크리스마스 주간을 맞이한 제과점 주인은 정말 피곤해보였다.
무릎까지 내려온 그의 다크써클이 불쌍해 보인 탓에, 위위천은 툴툴거리며 다른 빵 안 살 거면 나가라는 제과점 주인을 향해 위협 사격을 가하지 않았다. 위위천의 사격 실력은 무척 거지 같았으므로, 제과점 주인은 방금 목숨을 보전한 셈이었다.
그러나 운 좋게 명줄이 길어진 제과점 주인과 달리, 위위천은 운이 나빴다. 예수 생일이 뭐라고 다들 크리스마스 케이크에 미쳐서는! 위위천은 그치곤 드물게 빠른 속도로 차를 몰았다. 이 동네에 없으면 다른 동네에 가서 사오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다른 동네에서도 케이크를 구하긴 쉽지 않았다.
“홀 케이크는 다 나갔어요.”
“왜요?”
“왜냐뇨? 내일은 크리스마스니까요.”
“…….”
“오전도 아니고 이 시간에 오면 당연히 다 나가죠.”
없는 것도 그 자리에서 찍어 내 파는 대도시와 달리, 테베의 빈민촌은 이 동네 저 동네 가릴 것 없이 배째라 식 운영에 익숙해져 있었다.
위위천은 살면서 처음으로 루부스가 테베 관리를 좆같이 했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이런 대목에 매진됐다고 케이크를 더 안 팔다니. 이건 자본주의 사회의 붕괴였다.
하지만 위협 사격을 시도하기엔 제과점 주인2도 너무 피곤해 보였다. 제과점 주인들은 그저 솔드 아웃 표시를 개무시하고 가게 안으로 쳐들어 와 케이크를 달라고 요구하는 이상한 중국계? 남자를 최대한 빨리 쫓아보내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결국 위위천은 빈손으로 다시 차에 올랐다. 시간은 벌써 오후 9시였다. 30분 만에 돌아가기로 했는데, 두 시간이 지난 것도 모자라 케이크도 못 샀다.
레비에게 케이크를 못 사 조금 늦어진다는 메시지를 보내두긴 했지만, 이쯤이면 오븐에 처박힌 칠면조가 다 되다 못해 탈 시간이었다. 위위천은 운전대를 잡은 채로 잠시 갈등했다. 포기하고 돌아갈지, 아니면 기어코 대도시로 나가 케이크를 사 올지.
정말 바보 같은 고민이었다. 만약 레비 벨랑제르가 위위천의 수많은 구 애인과 비슷한 궤를 공유하는 존재였다면, 위위천은 레비에게 ‘크리스마스에 케이크가 없어도 괜찮나요?’라는 질문 자체를 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에게 한 조각 먹여보겠다고 운전대를 직접 잡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위위천은 다정하긴 하지만 헌신적인 편은 아니었으므로, 누군가 크리스마스 케이크에 대해 불평한다면 대충 몸으로 떼우고 넘어갈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레비 벨랑제르는 위위천의 새 가족이었다. 가족이 처음 보내는 크리스마스니까… 이건 성질머리 고약한 고아 새끼, 그러니까 제 입에 들어가는 케이크가 아니라 어쨌든 ‘정상성’ 흉내를 내는 하나의 집단에게 돌아가는 케이크였다.
그러니 이 케이크는 이전과 달리 의미가 있다.
위위천은 재빠르게 합리화를 끝낸 뒤 대형 마트를 향해 차를 돌렸다. 조각 케이크라도 사 가겠다는 일념 하에 웬일로 카메라 없는 구간에선 속도도 조금 위반했다. 레비가 봤다면 ‘교통법을 지켜야 한다면서요?’라고 되물었을 범법이었다.
그렇게 20분 만에 폐점을 15분 앞둔 대형 마트에 도착한 위위천은 폐기 직전의 크리스마스 케이크 하나를 건지는 데 성공했다. 점원은 당황한 얼굴로 결제해 달라는 위위천을 바라봤다.
“저, 손님.”
“네.”
“이거 유통기한이 25일 새벽 2시까지인데요.”
“네.”
“정말 구매하실 건가요?”
“네.”
위위천은 네네봇이 되어 고개만 끄덕였다. 비록 지금이 24일 오후 9시 44분이고, 25일 새벽 2시까진 몇 시간 남지 않았다고 한들 그게 어떻단 말인가? 심지어 이 시한부 카운트 다운 케이크는 생크림 위에 딸기도 올라가 있었다. 와, 그야말로 완벽한 쇼트 케이크. 크리스마스 쇼트 케이크!
“영수증 지참하셔도 환불은 어렵습니다.”
“네.”
그렇게 위위천은 점원의 ‘뭐하는 새끼지?’라는 눈빛을 한가득 받은 채 크리스마스 케이크 수렵에 성공했다. 고정핀이 없어 들고 뛰면 케이크 모양이 흩어질 수도 있다는 안내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위위천은 다시 차에 올랐다.
돌아가는 길엔 다시 운전 속도가 느려졌다. 위위천은 안전 속도를 준수하며 거북이처럼 운전했다. 마흔두 살은 교통사고로 죽기에 아직 어린 나이였고, 안전등이 설치되지 않은 빈민가의 싸구려 포장 도로는 방심하면 지옥에 가기 딱 좋았다. 게다가 야밤 운전은 눈이 하나뿐인 위위천에게 치명적이었다.
그래도 위위천은 무사히 살아 돌아왔다. 조금 늦었지만.
그가 케이크 수렵에 성공해 귀환한 시각은 오후 11시 27분이었다. 크리스마스가 30분 남은 시점이었고, 오븐 속 칠면조 구이는 미지근하게 식어버렸다.
레비는 한때 어항이 있었던 자리에 앉아 정원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위위천은 그래도 레비가 저처럼 외부에서 사람을 기다리는 버릇이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기온이 좀 높아졌다곤 하지만, 크리스마스 직전의 날씨는 여전히 영하였다.
“…늦었네요.”
“아, 레비.”
“30분 만에 온다더니… 4시간 만에 왔는데….”
“저 정말 많은 일이 있었어요.”
위위천은 조수석에 모셔뒀던 케이크를 꺼내 레비에게 내밀었다. 아직 크리스마스 이브였고, 그 케이크는 폐기되기까지 대략 2시간이 남은 상태였다.
레비는 좋은 건지 황당한 건지 알길 없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그 케이크를 받았다. 둘이서 먹기엔 너무 큰 3호 사이즈였다. 그 마트에도 남은 게 이것밖에 없으니 별수 없는 일이었다.
“딸기는 다 당신이 먹어도 돼요.”
“…….”
“나는 사실 케이크를 안 좋아하거든요.”
두 사람은 크리스마스가 올 때까지 작은 식탁에 마주앉아 늦은 식사를 했다. 오븐에 오래 처박혀 있던 칠면조는 놀랍게도 기름이 쭉 빠져 꽤 맛이 괜찮았다. 위위천은 사람 썰던 솜씨로 칠면조도 깔끔하게 분해했다.
와인도 한 병 나눠 마셨다. 정확히 말하자면 레비가 한 잔을 마셨고, 나머지는 전부 위위천이 비웠다. 싸구려 와인은 풍미는 없었지만, 설탕 값이 아까웠는지 너무 달지도 않았다. 그게 꽤 분해된 칠면조와 잘 어울렸다.
“메리 크리스마스.”
시계를 확인하며 식사를 한 게 아니라서, 그 말은 크리스마스가 7분 지난 뒤에나 흘러나왔다. 메리 크리스마스. 위위천은 케이크 상자를 조심스레 뜯으며 크리스마스가 뭐 대단한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던 사람들을 이해했다.
“레비.”
“네.”
“문제가 있어요.”
“뭔데요?”
“저 초를 안 샀어요.”
“…….”
“케이크에 향 꽂으면 안 되겠죠?”
“뭘 살 거면 다음엔 같이 사러 가요….”
생크림 위에 올라간 딸기는 놀랍도록 맛이 없었다. 사실 딸기 철이 아니긴 했다. 위위천은 이 케이크가 왜 내내 안 팔렸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하지만 레비는 별다른 불평 없이 케이크를 잘라 먹었다. 한 조각뿐이었지만, 위위천도 웬일로 포크질을 했다. 기억하는 것보다 그렇게 달지는 않았다.
맛은 뒈지게 없었지만 놀랍게도 먹을 만했다. 모든 게 엉망인데 대충 흘러가는 삶이 이런 맛일 것 같았다. 시간은 아직 새벽 두 시가 아니었고, 줄 전구를 단 전나무 트리는 조금 힘겨워보이긴 했어도 멀쩡하게 빛났다. 오… 크리스마스.
예수 생일도 나쁘지 않네…. 위위천은 레비가 기꺼이 양보한 맛 없는 데코용 딸기를 입에 집어 넣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식사를 너무 늦게 마친 죄로, 두 사람은 새벽 3시까지 영화나 봤다. 소화를 시키겠다는 명목이었다. 사실 영화는 그냥 이용당했고, 틀어 놓고 섹스하는 것에 열중했다. 크리스마스는 정말 아무 이유없이 섹스하기 좋은 시기였다.
DVD 플레이어가 ‘죽여줘….’라고 염불을 외우며 두 번쯤 다시 돌아갔을 때, 레비는 위위천에게 줄 게 있다며 타임을 외쳤다. 위위천은 환자의 왼손을 내리누르는 치과 의사처럼 그 말을 못 들은 체했다.
그렇게 정신을 차려보니 크리스마스 정오였다.
“이럴 수가. 전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요.”
“…….”
“내가 케이크를 절반이나 버리는 환경 오염의 주범이 될 줄 알았다고요.”
위위천은 크림 덩어리가 된 케이크를 슬프게 바라봤다. 의료 보험 없는 마피아가 무차별하게 섭취하기 좋은 음식은 아니었다.
거기다 레비나 위위천 둘 다 입이 짧았으므로, 유통기한 지난 (심지어 냉장 보관도 안 했다.) 케이크를 다시 퍼먹을 것 같지도 않았다. 위위천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케이크를 매장했다. 널 수렵해서 미안해. 하지만 크리스마스니까 이해해 줄 거지? 산타가 아니라 사탄이 할 법한 생각이었다.
“레비….”
“…….”
“화났어요?”
엉망인 부엌을 치우고 접시 하나에 금이 가 버린 설거지 직후, 위위천은 여전히 침대에서 못 헤어나오는 중인 레비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방수 매트리스로 교체한 지 얼마나 됐다고, 두 사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침대에서 곧잘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제가 줄 거 있다고 했잖아요.”
“그렇지만 박고 있는데 어떻게 빼라는 건지….”
“…….”
“알겠어요. 앞으로는 노력해 볼게요.”
뺨에 엉겨 붙은 긴 금발을 귀 뒤로 넘겨주자, 여전히 졸음이 가시지 않은 눈가가 몇 번 깜빡였다.
“우와, 방금 정말 고양이 같았어요.”
“…고양이가 좋아요?”
“아뇨.”
“…….”
“좋다고 말하면 언젠가 고양이도 데려올 것 같아서. 동물은 수명이 짧잖아요.”
“…….”
“우리 한약방은 최근에 애완동물 반입 금지로 법이 바뀌었어요.”
비몽사몽한 레비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위위천은 사실 상대가 어떤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합병식부터 사이즈 맞지 않는 장갑을 줬던 걸 은근하게 신경 쓰지 않았던가. 크리스마스 전 주엔 제 손을 붙잡고 하염없이 주무르기까지 했다. 그쯤되니 모르기도 어려웠다. 우와, 숨기는 거 너무 못하지 않아? 위위천은 레비가 서프라이즈에 뜻이 없다고 생각했다.
“난 크리스마스 선물 준비 못 했는데 어쩌죠.”
“괜찮아요.”
“왜 괜찮지? 사실 준비했어요.”
“…뭔데요?”
“선물 교환식할 때 보여줄게요.”
선물 교환식이라는 소리에 그제야 레비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위위천은 지치지도 않고 레비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이를 세워 약하게 깨물어 봤지만, 당연하게도 딸기 맛이나 생크림 케이크 맛 같은 건 나지 않았다.
“선물 교환식부터….”
이로 문 자리를 혀 내밀어 핥으니, 크리스마스가 다 지나기 전에 선물 교환식부터 하겠다며 미약한 저항이 따라왔다. 아쉬운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로 느릿느릿 떨어진 위위천이 레비에게 작은 주얼리 박스를 내밀었다.
예수 생일은 경험상 위위천에게 별로 특별한 날이 아니었다. 몇 번을 다시 생각해 봐도 크리스마스는 그냥 섹스하기 좋은 날일 뿐이었다.
“고마워요.”
그래도 작은 다이아몬드 캐럿이 박힌 목걸이를 홀린 듯이 쳐다보는 사람을 보고 있자면, ‘크리스마스도 그렇게 나쁘진 않은데?’라고 생각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건 정말 모순적인 일이었다. 위위천은 단 것은 좋아하지 않았고, 크리스마스 트리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이게 진짜 다이아몬드가 맞는지를 여러 번 물어볼 만큼 번잡스러운 구매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케이크 한 조각을 다 먹고 트리를 과도하게 꾸몄다. 잘 알지도 못하는 주얼리에 대해서 알아본다고 전당포 노인을 귀찮게 하는 바람에 뒈지게 욕을 얻어먹은 것도 최근이었다.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사소한 지점이 인지하기도 전에 변해버린 것이다.
그 달콤한 것이 삽시간에 난도질당한 꼴을 봐요….
위위천은 과거의 제가 했던 생각을 떠올렸다. 오, 불쌍한 크리스마스 쇼트 케이크. 하지만 내가 아니었다면 새벽 2시에 폐기 됐을지도 모르잖아. 자연스러운 합리화가 이어졌다. 위위천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레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제는 저도 선물을 받을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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