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Orange in the room
  • 2023. 12. 11.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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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열일곱에 제 거처를 마련한 뒤로, 위위천은 툭하면 의미없는 물건을 사서 창고나 차고에 쌓아두곤 했다. 개중에는 정말 중요한 인물들에게 받은 것들이 섞여 있기도 했으나, 그는 소중한 것과 쓸데 없는 것을 꽤 잘 구분할 줄 알았다. 그러므로 창고 구석에 처박혀 먼지가 쌓인 것들은 열에 아홉은 쓰잘데기 없는 게 맞았다.

     

    식품 저장고는 그 ‘쓰잘데기 없는 것’의 산이었다.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잖아요? 저는 아직 지구촌이 별로 평화롭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빌미로 위위천은 식품 저장고에 유통기한이 10년쯤 되는 베이크드 빈 통조림을 잔뜩 사다두는 걸 즐겼다. 코스트코 같은 대형 창고 마트는 위위천의 이런 성향을 가속하는 데 한몫했다.

     

    그 결과, 레비 벨랑제르는 위위천의 식품 저장고를 열어봤을 때 제법 기가 막혔을 터였다. 거기엔 놀랍게도 ‘이미 유통기한이 지난’ 베이크드 빈 통조림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통조림 브랜드는 각각 달랐고, 어째서인지 그 통조림 사이에 함정처럼 절인 청어 통조림 같은 게 튀어나와 있었다. 몇 개는 심지어 유통기한이 6년 정도 남은 채였다. 도대체 언제 어디서 구매한 건지도 모를 수백 개의 통조림이 정말로 거기에 있었다. 아무 이유도 없이.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식품 저장고의 온도가 선선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곰팡이나 벌레가 끼지 않은 통조림의 산은 그렇게 역겹지는 않았다. 적어도 썩는 냄새는 안 났으니까. 단지 사람을 압도할 만큼 그 수가 많고 난잡했을 따름이었다.

     

    위위천은 레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멋쩍은 얼굴로 유통기한이 6년 남은 통조림을 들어 보였다.

     

    “그래도 이건 먹을 수 있을걸요?”

     

    레비는 그 통조림을 내다 버렸다. 말 그대로 내다 '버렸다'. 정 못 믿겠으면 제가 그 자리에서 먹는 걸로 증명해주겠다는 위위천을 말리려면 가져다 '버리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긴 했다. 남의 물건을 버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 물건 태반이 쓰레기라면 분리수거 자체는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앞으로… 웬만하면 통조림은 사지 않는 게 좋겠어요.”

    “그래도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데.”

    “하지만 하나도 먹지 않았잖아요….”

    “아직 통조림을 먹어야 할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니까요. 좀비 사태라거나, 핵 전쟁이라거나… 사실 이 한약방 지하에 벙커가 준비돼 있어요.”

    “…진짜요?”

    “아뇨. 거짓말이에요.”

     

    위위천의 한약방에는 지하실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다락방과 지하실까지 있었다면 이 엄청난 잡동사니의 산이 몇 개는 더 있었을 테니까. 위위천 스스로도 그런 공간이 없다는 걸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빈 공간이 있으면 곧잘 채워 넣고 싶어 했다. 공란을 견디지 못하는 성향은 감정 과잉처럼 그가 오래 앓고 있는 질병 중 하나였다.

     

    무엇으로든 채워야 한다는 강박. 술과 마약, 담배와 섹스까지 지치지 않고 해대면서도 위위천은 늘 공허함을 느꼈다. 그건 식품 저장고 안에 통조림의 산을 쌓아둔다고 해서 나아지는 종류가 아니었다.

     

    “장은 같이 보러 가는 게 좋겠어요.”

    “통조림은 두 번 다시 안 살 테니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사도 되는데… 이렇게 많이 사지만 않는다면요.”

     

    통조림의 산이 사라진 식품 저장고는 황량한 벌판처럼 보였다. 무엇이든 이 공간을 새롭게 채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통조림을 사지 않는다면 뭘 사야 하지? 위위천은 잠시 그 공란을 바라보았다. 그 공백 사이에 한바탕 통조림을 가져다 버리느라 기진맥진한 레비가 서 있었다.

     

    그건 여전히 공란이었다. 위위천은 공백을 빨리 채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빈 곳이 생기면 안 돼. 그는 너무 쉽게 공허함을 느꼈다. 기쁨이나 즐거움은 한철이지만, 부정적인 감정은 지속 시간이 길었다. 공허함은 분류를 따지자면 슬픔과 결이 비슷했다. 부정적인데다 오래 가는 감정이라는 소리였다. 그러니 길고 긴 공허함이 찾아오기 전에 뭐든 넘치게 채워두는 것이 안전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사람이 하나 서 있자 공란은 ‘견딜 수 있을 만한’ 공백이 되었다. 땀에 절은 레비가 ‘통조림은 역시 더 안 사는 게 낫겠어요….’라고 중얼거렸다. 위위천은 그 말이 만족스럽게 느껴졌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통조림은 더 살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그날 저녁, 두 사람은 레비가 모는 차를 타고 식료품을 사기 위해 시내로 향했다. 위위천은 차 안에서 다 대 일로 싸웠던 때보다 더한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레비는 운전대만 잡으면 스피드 레이서로 변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럴 수가. 위위천은 위조 운전 면허증을 폐기하고 진짜 운전 면허증을 발급 받을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마흔두 살은 교통사고로 죽기에 아직 젊은 나이였다.

     

    창고형 대형 마트가 아니라 그나마 가까운 슈퍼마켓에 간 것도 오로지 목숨 보전을 위해서였다. 위위천은 다른 도시에 있는 창고형 대형 마트까지 갔다간 황천길로 넘어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레비는 고속도로를 타는 것에 대단히 자신감이 있어 보였지만, 위위천은 ‘대형 마트에 가면 통조림을 사고 싶어질 것 같다’는 간악한 소리로 목적지를 바꾸는 것에 기어코 성공했다.

     

    두 사람이 방문한 슈퍼마켓은 아시아인이 운영하는 식료품점이었다. 온갖 식재료가 거기 다 있었다. 살아있는 ‘중국산’ 가재를 보며 위위천은 이 슈퍼마켓도 잘못된 목적지는 아니었는지 짧게 고민했다. 저건 도대체 어떻게 살아서 유럽까지 온 거지?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쇼핑 자체는 만족스러웠다. 적어도 위위천이 잔뜩 살 만한 통조림이 없다는 점에서 그랬다. 지네 그림이 그려진 통조림이 하나 있었지만, 위위천도 그런 통조림을 살 만큼 용기가 가상하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3년 동안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뱀술을 어떻게 버리느냐로 레비와 20분 동안 토론하던 중이었으니, 더한 물건을 구매하지 않는 게 신상에 이로웠다. 레비가 나중에 자신을 내다 버리고 싶어 하면 상황이 아주 곤란해질 게 분명했으니까.

     

    콘소메 통조림 앞에서 아주 잠깐 갈등하긴 했으나, 위위천은 통조림 대신 오렌지를 샀다. 오래 보관할 수 없는 과일은 식품 저장고에 쌓아둘 수가 없었다. 알이 단단하고 크기가 작은 오렌지는 슈퍼마켓 직원의 강력한 추천 때문에 위위천의 손에 굴러 떨어졌다. 고작 두 명이서 먹을 건 데도 위위천은 그 오렌지를 여섯 개나 샀다. 레비는 그가 오렌지를 무아지경으로 주워담는 동안 다른 과일을 장바구니에서 허겁지겁 빼고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다시 목숨을 건 드라이브 끝에 집으로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 치워도 끊임없이 새로운 잡동사니가 튀어 나오는 한약방은 이제 위위천만의 집이 아니었다. 레비는 이 한약방 꼴을 보고도 여기서 살 결심을 한 몇 없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리고 위위천의 ‘개인적인’ 공간에 뿌리를 내리는 데 성공한 유일한 존재기도 했다.

     

    아무하고나 사귀는 것치고, 위위천은 선이 명확한 사람이었다. 그는 누구나 집으로 초대했지만, 그 누구와도 함께 살지 않았다. 적어도 레비 벨랑제르 전까지는 그랬다. 일단 평범한 인간이라면 한약방의 실체를 본 뒤엔 여기서 살고 싶어 하지 않았고, 위위천은 남에게 같이 살자는 말을 꺼낼 만큼 격의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늘 사람들과 적정 거리를 유지하고 싶어 했다. 아주 가까이 지내고 싶어 하다가도 너무 가까워지면 알아서 뒤로 물러섰다. 더 이상 마약에 손대지 않는 것처럼, 그는 자신을 망치는 일에는 제법 조심스러웠다. 공란을 채워보겠답시고 썩을 만한 음식을 쌓아 놓지 않는 것과 비슷한 궤였다. 위위천은 곰팡이가 피거나 썩지 않을 것만 골라서 창고 한켠에 두었다. 그게 안전하기 때문에. 언제든 다시 꺼내올 수 있고, 다 버려도 괜찮을 것들만….

     

    “오렌지… 다 먹을 수 있을까요?”

    “글쎄요.”

    “…….”

    “우리가 하루에 하나씩 먹으면 사흘 안에는 다 먹을 텐데.”

    “…노력해 볼게요. 다 먹을 수 있도록.”

    “내가 매일 까 줄게요.”

     

    그러니 알이 단단하고 크기가 조금 작은 오렌지는 너무 위험한 무언가였다. 그건 통조림처럼 유통기한이 10년쯤 되는 ‘안전 식품’이 아니었다. 일주일만 지나도 상해 버리는 신선 과일이었다. 통조림보다 훨씬 비쌌고, 손질하는 것도 번거로웠다.

     

    위위천은 오렌지를 한 손에 쥐어 보았다. 오렌지 껍질은 짧은 손톱으로 까기 어려울 만큼 두꺼웠다. 그래도 맨손으로 못 깔 정도는 아니었다. 부엌 카운터에 몸을 기대고 선 채로, 위위천은 분주하게 움직이는 레비의 등을 보며 오렌지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독한 약내로 가득한 한약방에 상큼한 오렌지 향이 감돌았다.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손톱이 파고 든 과육에서 과즙이 흘러나왔다.

     

    “레비.”

    “네?”

    “이리 와 봐요.”

     

    과즙에 젖은 손이 금방 끈적해졌다. 과일 향은 한약재 향보다 가벼워 공기 중으로 쉽게 퍼졌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가까이 온 레비의 입에 말끔하게 까는 데 오렌지 한 조각을 밀어 넣으며, 위위천은 이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썩기 전에 다 먹으면 되니까… 더 이상 무언가를 강박적으로 쌓아두지 않아도 별로 공허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

     

     

     

    2.

     

    거실에 암막 커튼을 다는 건 꽤 고생스러운 일이었다.

     

    그간 햇빛이 들어오든 말든 아무렇게나 방치한 탓에, 위위천이 가진 고서들은 전부 표지가 누렇게 변해 있었다. 고서들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최근에 구매한 베스트 셀러 자기 계발서도 이미 갈색으로 변색을 끝마친 상태였다.

     

    종이가 상하거나 말거나 신경도 안 쓰는 위위천과 달리, 레비는 제법 ‘위위천의 물건’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미 고장난 지 오래라 언제 어느 장면을 보여줄지 모르는 DVD 플레이어가 지난 분리수거에서 살아남은 것만 봐도 그랬다. 레비는 히치콕의 <사이코>를 샤워실 장면부터 보게 되더라도 그걸 버려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덕에 거실은 다른 창고나 정원에 비해서 정리에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위위천은 뭘 다 가져다 버리지도 않았는데 큰 창을 통해 정원을 내다 보라며 어디서 가져왔는지 짐작도 안 되는 앤티크 흔들 의자를 새로 들였다. 그걸 보고 레비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모를 일이나, 아무튼 위위천은 레비가 그걸 마음에 들어 한다고 생각했다. 가끔 거기서 꾸벅꾸벅 조는 걸 두어 번 목격한 탓이었다.

     

    종이나 표지가 상해도 알 바 아니었던 책과 달리, 위위천은 레비가 햇빛에 상하는 건 원하지 않았다. 암막 커튼을 단 이유는 그게 다였다. 흔들 의자에 앉아 정원을 바라볼 때, 햇빛에 눈 부시지 말라고. 커튼 봉을 설치하고 하나하나 못을 박는 건 성가신 일이었지만, 거실에 더 이상 햇빛이 정면으로 내리꽂히지 않게 된 건 꽤 만족스러웠다. 커튼을 잘만 치면 거실에서 붙어먹어도 남들 눈에 보이지 않을 거라는 게 가장 마음에 들었고.

     

    “벙커가 없다는 거 진짜죠?”

    “그럼요. 지하실도 없어요.”

    “…그러면 정말, 다 끝났어요.”

    “그러네요. 이 집이 이렇게 넓었다니.”

    “…….”

    “알겠어요. 앞으론 진짜 치우고 살게요.”

     

    거실까지 정리가 마무리 된 뒤에, 위위천은 레비에게 정말 ‘이전처럼 어지럽히지 않겠다’라고 서약했다. 레비는 그래도 된다고 중얼거렸지만, 위위천은 더 이상 잡다한 것을 쌓아둘 생각이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흔들의자나 암막 커튼처럼 새로운 걸 갑작스럽게 들이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었으나, 이전처럼 헐값에 싸구려 흑백 영화 DVD를 제목 확인도 없이 잔뜩 사오는 짓을 하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실내에서 담배 피우는 버릇도 고쳤는데 고작 DVD 충동 구매를 못 고칠 리가 없다. 위위천은 정원 한구석에 흡연할 공간을 따로 마련해두었다. 혼자 살 때는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이제는 침대에 기댄 채로 담배를 피우는 것 만큼은 고칠 필요가 있었다. 아무리 양심을 통조림과 함께 내다 버렸다고 할지라도, 같이 사는 상대에게 그 정도로 간접 흡연을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난간을 조금 더 튼튼하게 고친 복층은 온전히 레비만의 공간이었다. 그곳엔 그나마 치울 게 많지 않은 덕이었다. 위위천은 보일러 탓을 하며 곧잘 레비를 그 방에서 제 방으로 불러냈다. 이틀에 한 번만 하겠다는 약속은 레비의 입주 이래로 몇 번 지켜지지 못한 채 흐지부지 흩어졌다. 그 이틀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이 미안해, 위위천은 담배 만큼은 바깥에서 피우기로 한 것이다. 아주 같잖고 대단한 결심이었다.

     

    “밖에서 피우면 추울 텐데.”

    “괜찮아요. 추위를 잘 안 타니까.”

    “…이김에 좀 줄여요.”

    “그럴까요?”

    “네.”

    “노력해 볼게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으나, 많은 게 서서히 달라졌다. 공간에 사람을 채우는 건 기대보다 훨씬 대단한 일이었다.

     

    위위천은 이제 한약방을 어지럽히지 않았고, 담배는 바깥에서 피웠다. 전보다는 피우는 양이 줄어든 것도 사실이었다. 적어도 레비가 거실에 있는 동안은 줄 담배를 태우지 않았으니까. 원나잇을 위해 사람을 데려오던 버릇도 반쯤 사라졌다. 같이 사는 사람이 있으니 함부로 타인을 초대하지 않게 된 것이다.

     

    손가락을 (물리적으로) 걸고 약속했으니, 이제 와 무를 수도 없었다. 자극이 덜한 삶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위위천은 제가 이렇게 절제 (레비는 이것을 별로 절제라고 생각하지 않을 테지만) 하고 살 수 있다는 것에 조금 놀랐다. 이게 되네? 아무튼 신기한 일이었다.

     

    술은 마지막까지 줄이지 못했지만, 뱀술은 기어코 버렸다. 술에 담겨 3년이나 살아있던 뱀은 위위천을 향해 잔뜩 쉭쉭거리더니 곧 어딘가로 자취를 감추었다. 위위천은 저 뱀이 나중에 기어코 원수를 갚으러 올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굳이 레비가 보는 앞에서 뱀을 죽이지는 않았다. 어쨌든 그걸 ‘놔 주는 걸’ ‘보여줬다’는 게 중요했으니까.

     

     

     

    3.

     

     

    하지만 뱀을 놔주는 것과 사람을 놔주는 건 별개의 일이라, 위위천은 레비 앞에서 위악을 떨며 뱀을 살려줬던 일을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하게 되었다.

     

    그간 위위천은 자신을 스쳐 지나간 수많은 인연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에게도 그가 고작 그 정도에 불과한 인물이었을 테니까. 그러나 레비 벨랑제르는 궤가 좀 달랐다. 레비는 술에 담긴 뱀은 아니지만, 어쨌든 위위천의 한약방에 알아서 기어들어 온 사특한 무언가였다.

     

    그런데 임무를 나간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일주일째 감감무소식이라니.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어도, 나갈 때는 그래선 안 되는 법이었다. 통조림을 다 버려놓고… 그 공란에서 도망쳐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자기가 버린 것 만큼은 적재돼 있어야 하는 게 법도와 이치에 맞는 일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레비는 불행하게도 위위천의 한약방으로 꼭 돌아와야만 했다. 적어도 그가 버린 베이크드 빈 통조림의 유통기한 만큼은 위위천의 곁에 쌓여 있어야 수지타산이 맞았다.

     

    위위천은 가만히 앉아 레비가 돌아오는 걸 기다리는 대신 그를 직접 찾아나가기로 결심했다. 일주일 동안 줄 담배를 태운 탓에 금연은 완전히 물 건너 간 상황이었다. 한약을 첩으로 지어 먹는다고 해도 목에 낀 니코틴이 다 빠질 것 같지 않았다.

     

    결국 레비가 종적을 감춘 지 열흘 째 되는 날, 위위천은 기어코 레비가 숨어 든 은신처를 찾아냈다. 그 아시안 마켓에서 사 둔 오렌지가 물러 버린 시점이었다. 내가 그래서 함부로 쌓아둘 수 있는 것만 사는 거라고 그랬잖아요…. 당신은 이렇게 너무 쉽게 무르고 함부로 내다 버릴 수 없는 데다가 비싸고, 자꾸 상하니까….

     

    “문 좀 열어주세요.”

    “…….”

    “저 정말 화나지 않았어요.”

     

    그 말 그대로 위위천은 놀랍도록 이성적인 상태였다. 물론 순간적으로 문 사이로 팔을 밀어 넣어 문고리를 꺾을까 고민한 건 사실이지만, 어쨌든 그런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대신 눈물을 보이는 걸 선택했으니까. 이보다 이성적일 수는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레비는 위위천의 눈물을 이기지 못하고 문을 열어주곤 미안하다고 속닥거렸다. 몸을 꽁꽁 싸매고 있었으나, 거동이 부자연스러운 걸로 보아 등이나 허리를 다친 모양이었다.

     

    저격수가 도대체 왜 다치는 거지? 위위천은 원거리에서 총질하는 저격수가 다치는 게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크루도 아니고 체셔가 관리하는 크루에 속해 있으면서 이런 부상을 입는 게 말이 되는가? 직속 상사도 없는 자신은 맨날 암살만 해서 몸에 흉터 하나 없이 매끈한데? 이건 정말 억울한 처사였다.

     

    그러나 여기서 ‘대체 왜 다치는 거예요?’라고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기회가 되면 맨손 격투를 가르쳐야겠다고 속으로만 다짐하며, 위위천은 또 닭똥 같은 눈물이나 뚝뚝 흘렸다. 자신이 얼마나 그를 걱정했고, 또 얼마나 외로웠으며… 오렌지가 물러 버린 것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 놓았다.

     

    그런 말을 들으면 레비는 마음이 약해져 위위천에게 곧잘 미안하다고 대꾸했다. 위위천은 그 타이밍을 맞춰 매번 물리적으로 손가락을 잘라야 하는 새로운 약속을 내뱉었다. 자, 다음에도 이렇게 말 없이 잠적하면 당신 검지를 자를 거예요. 다쳐도 돌아와서 말해야 돼요…. 좋아요, 당신은 방금 당신 중지까지 건 거예요. 이것도 무를 수 없어요…. 당신은 불쌍하게도 많은 걸 저당 잡히고 말았어요. 상냥한 사람들은 대개 그렇게 불행해지죠.

     

    손가락이 걸린 약속은 두 사람 모두에게 치명적이었다. 위위천은 소지나 약지 없이도 사람 하나는 거뜬히 죽일 수 있지만, 침 놓는 일에서는 그 손가락 두 개가 모두 필요했다. 맥을 짚는 일이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복잡했기 때문이다.

     

    “이제 돌아가요.”

    “차를 안 가져 왔는데….”

    “내가 몰고 왔어요.”

    “면허 없으시잖아요.”

    “있어요. 위조 면허.”

    “…….”

    “다친 사람한테 운전하게 할 수는 없잖아요?”

     

    유치한 복수였다.

     

    위위천은 거북이처럼 차를 몰았다. 달릴 수 있는 고속도로에서도 적정 속도로만 운전했다. 스피드 레이싱을 즐기는 레비가 조수석에서 답답해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냥 안전하고 느리게, 가는 길에 슈퍼마켓에서 기어코 오렌지 세 알을 도로 사서… 그런 식으로 집에 돌아갔다. 위위천은 이런 일을 위해서 앞으로도 ‘진짜’ 면허는 따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날 저녁, 위위천은 거실에 암막 커튼을 쳤다. 날이 어두워져 더 이상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데도 그랬다. 바깥에서 혹시라도 한약방 내부가 보이지 않게끔 짙게 커튼을 치고, 상처를 보자고 살살 꼬셔 레비를 벗긴 뒤 거실 소파에 엎어 두고 일주일간 하지 못한 섹스를 몰아서 해치웠다.

     

    상처가 벌어지기라도 할까 봐 뒤로 엎어 놓고 박지 못한 게 유일하게 아쉬운 점이었다. 위위천은 제가 만족할 때까지 지쳐 나가 떨어진 상대에게 들러 붙어 있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눠 먹은 오렌지 향이 아직도 어렴풋하게 남아 있었다.

     

    통조림과 싸구려 흑백 영화 DVD 대신 드디어 ‘사람’이 그의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쉽게 무르고 상하는 데다 함부로 가져다 버릴 수 없는 건 물론이고 곧잘 뜻대로 되지 않는 ‘쓸데없지 않은’ 것이… 여기에 있었다.

     

    그건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위위천은 지쳐 잠든 상대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익숙한 동정심이 치밀어 올랐다. 불쌍해라. 그렇게 손가락을 거는 바람에 이 잡동사니의 산에 당신이 갇히게 된 줄도 모르고…. 내가 말했죠? 상냥한 사람들은 대개 그렇게 불행해진다고.

     

    그러나 위위천은 술에 담긴 뱀을 ‘보여주기’ 위해서만 놔 주는 인간이었다. 그는 다정했지만 선량과는 거리가 멀었다. 천국과 지옥이 실재한다면, 그는 세상을 지옥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죄로 더한 지옥에 떨어질 존재였다. 그러므로 레비 벨랑제르는 술에 담긴 뱀보다 처지가 나빴다. 위위천은 더 이상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잡아둔 것을 놓아줄 필요가 없었다. 불쌍해라! 위위천은 속으로만 그렇게 중얼거렸다. 너무 크게 동정심을 드러내면, 기껏 정리된 공간이 순식간에 무너질 것 같았다. 한약방은 안타깝게도 모래성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러면 안 되지. 아직 베이크드 빈 통조림의 유통기한이 다 지나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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