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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이 일수로 따지면 며칠이라고 생각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체커판의 백색 킹이 길버트의 검지 끝에 툭 밀려 넘어갔다. 229일을 제하고 오로지 365일만으로 생각해서 계산해 보면, 9년은 총 3285일이야. 3285일이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알아? 적어도 호그와트 7년은 충분히 보내고도 남는다는 거야. 빌어먹을 마법사 세계를 구하는 것보다 오래 걸리는 거라고. 왜냐하면 3285일은 78441시간이니까. 체커판 밖으로 밀린 백색 킹은 아예 데구르르 구르더니 테이블 밖으로 떨어졌다. 저스틴은 길버트의 말을 팔짱을 낀 채 가만히 듣고 있다가 마법을 쓰는 대신 직접 몸을 굽혀 떨어진 체스 말을 주워들었다. 나한테 화났어? 일부러 눈썹 끝을 일그러트리며 말하는 것이 뻔히 보이는 저스틴의 시무룩한 표정에 길버트는 너 같으면 안 화나겠어? 같은 말을 목구멍 끝으로 다시 주워 삼켰다. 길버트는 여전히 저스틴의 불쌍한 척하는 저게 척인 걸 알면서도 - 얼굴에 약했던 탓이다.

 

<구남친의 과실이 9할이라면>

 

길버트 앨런은 솔직히 지나가는 사람 10명을 붙잡고 물어봐도 9명 정도는 저스틴 체이스가 잘못했다고 답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나머지 한 명? 그건 저스틴 체이스 본인일 테니까 제외하고. 호그와트 학창 시절의 연애야 뭐 어린애들 불장난이니 그렇다 쳐도 졸업 후에 멋대로 제 좁은 자취방을 점거하고 이 물건 저 물건 두고 가더니 어느 순간부터 잠수 이별을 때리는 것이 저스틴이었다. 그러더니 뭐? 이제 어느 정도 안정이 되고 자리도 잡았으니 결혼하자? 9년 만에 다시 만난 구남친이 하기에는 부적절한 대사가 아닌가? 길버트는 자신이 만약 조금만 더 발화점이 낮았으면 당장 어디 머글 드라마에 나오는 카페 장면처럼 저스틴에게 물을 뿌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 자식은 물에 맞아도 알아, 젖은 미남이 잘생겼지? 같은 소리로 더 화를 돋울 것이 뻔했다. 애초에 맞아주지도 않거나. 길버트는 번지르르한 얼굴로 고양이 끼고 사는 백수와 다르게 마법부의 충직한 오러로 돌아온 저스틴을 바라보았다. 세월이라는 것이 야속하기는 해서 길버트가 만나지 못하는 동안 저스틴은 미세하게 태도나 골격이 달라져 있었다. 제가 퀴디치판에서 은퇴했다는 걸 뻔히 알았으면서도 연락 한 번 안 한 게 눈에 보였다. 싫어. 저스틴의 결혼 제안에 길버트가 대뜸 거절의 말을 표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자기만 매번 끌려가는 게 열 받아서.

지난 세월 저스틴 체이스를 사랑했냐고 물으면 길버트 앨런은 억울하게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저스틴은 누가 체이스 아니랄까 봐 선을 쉽게 넘는 구석이 있었다. 그 넘은 선에 깃발 꽂고 이제 여기 내 거, 하는 건 말할 것도 없었고. 길버트는 자신이 이 자식한테 놀아났다고 생각했다. 가문도 좋은 놈이 대뜸 허락도 없이 혼자 사는 길버트의 영역을 침범했을 때부터 단호하게 막아야 했던 일을 하지 못해서 이 사달이 났다고 생각했다. 잠수 탄 구남친은 연락도 안 되는데 망할 블레이저에 처맞고 백수 된 자신의 집에 남은 물건은 주인이 오지 않아도 제 발 생겨서 사라지는 법이 없었다. 젠장, 스웨터는 또 왜 딱 품이 커서 편하고 난리야? 어디 나갈 일이 생기면 그런 변명으로 처분도 안 한 남의 옷을 입을 때마다 길버트는 내심 기분이 나빴다. 비참하지는 않았는데 열 받았다. 당장 저스틴이 옆에 있었다면 길버트는 저스틴의 정강이를 한두 번은 찼을 테였다. 구남친의 흔적을 지워버리고 다시 생각나지 않게 기억 저편에 묻어둔 채 새 사랑 시작하면 될 텐데 그것도 쉽지 않았다. 길버트가 가진 모든 것 중에 적어도 8할은 전부 저스틴 체이스가 사준 것들이었으니까, 지팡이까지도. 마법을 쓸 때마다 생각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었다. 길버트는 종래에 저스틴이 아주 계획적으로 큰 그림을 짜서 이렇게 자기 흔적을 남겨두고 간 건 아닌가 의심까지 들 지경이었다. 길버트는 막연히 드는 의심들을 내리누르며 이브의 밥그릇을 채워두었다. , 생각해보니 이 패밀리어조차 저스틴 체이스가 길버트에게 남기고 간 무언가였다. 정말이지 빌어먹을 구남친. 빌어먹을 저스틴 체이스.

 

<짜잔 그 의심이 정답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저스틴 체이스는 애초에 길버트 앨런에게 이 정도로 감길 계획이 없었다.

적당히 놀고 단물 빠지면 그냥 모르는 척 졸업하고 제 갈 길 갈 생각으로 가득한 시작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와 버렸는지 저스틴도 자세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는 의미다. 길버트는 저스틴에게 사랑한다고 말했고 저스틴은 그 말에 전혀 계획에 없이 덜미가 붙잡혔다. 길버트 옆자리에 다른 사람이 들어차는 걸 생각만 해도 기분이 나쁜 걸 보면 이게 그냥 소유욕인가 싶다가도 그런 간단한 단어로 설명되지 않는 질척한 감정이 기저에 있음을 깨달을 때면 저스틴은 문제가 단단히 틀어졌다는 것을 체감했다. 사람 감정이라는 게 원래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이지만 이 마음이 여기에서 이렇게 핀트가 나갈 줄은 저스틴 본인조차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저스틴은, 일단 도망쳤다.

자기가 길버트의 옆에서 사라진 새에 웬 이리 같은 새끼가 길버트한테 꼬이면 안 되니까 온갖 흔적을 남기고 자취를 감췄다. 말 그대로 잠수를 탄 것이다. 이거 개자식 아니야? 라고 누가 물으면 저스틴은 나처럼 잘생긴 개자식 봤어? 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고 사랑이라고 다를 바 없으니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것이 합당한 도리 아니던가. 저스틴은 판을 짜고 기다렸다. 때가 돼서 자신이 세운 원대한 계획을 실행해도 될 순간까지. 일단 저택에 감금한 다음에 혼인 신고서에 사인 시켜서 마법부에 제출하면 끝 아닌가? 길버트도 날 사랑한다고 했어. 그 말에는 9년 전에, 라는 부사가 생략되어 있었다.

 

싫어, 라는 거절을 예상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체스 말 하나를 주워들며 저스틴은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미세하게 색이 다른 두 눈동자를 오래 마주하지 못했다. 곧 기절시킬 예정인 구남친을 오래 봐서 뭐한단 말인가? 쓸데없이 감만 좋아서 스투페파이를 피하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혼인 신고서와 결혼 관련 법률 담당관은 이미 체이스 저택에 준비되어 있었다. 어쩔 수 없잖아. 체스 게임에서 퀸이 잡히면 그 게임은 바로 체크메이트. 체이스라는 이름답게 여기저기 안팎으로 적을 둔 가문에서 태어난 이상 길버트 앨런 같은 소중한 사람을 만들어 외부에 노출하는 일은 여기가 제 약점이요, 하고 노출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볼드모트도 자기 약점인 호크룩스를 일곱 갈래로 찢어서 숨기는 마당에 저스틴이라고 별 수 있었겠는가. 상대가 방심한 순간 기절 주문을 외면서 저스틴은 사과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날 사랑한다며.

사인 위조는 아주 신속하고 날렵하게 이루어졌다. 길버트가 기절한 상태에서 깃펜을 손에 쥐고 저스틴이 대신 사인했다는 것이 관건이었지만 어쨌든 길버트의 손에 펜이 쥐어져 있었으므로 법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 체이스 가문 담당 변호사의 의견이었다. 길버트는 저택에 호화롭게 감금된 채로 그렇습니다, 이렇습니다, 하는 변호사들을 향해 이게 머글의 지팡이다 하고 가운데 손가락이라도 들어주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저 피고용인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나 싶어 참았다. 구남친이 습관성으로 스투페파이를 남발하는데 이건 고소 안 되냐고 역으로 질문하고 싶었던 것도 어차피 변호사가 체이스 가문 소속이라 참아냈던 것이다. 저스틴과 길버트의 혼인 신고서는 과정이 어떻고 사인 절차가 어떻게 흘러갔든 상관없이 마법부 장관의 드문 일 처리 속도와 함께 대단히 빠르게 통과되었다. 이게 원래 한 명을 저택에 구금해 놓고 진행해도 되는 건가요? 물론 안 되지만 마법사 세계도 머글 세계와 별 다를 바 없이 공평성이나 형평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길버트는 화사한 얼굴을 하고 누가 봐도 저 혼인 신고서예요같은 느낌으로 흔들리는 종이를 손에 쥔 채 들어오는 저스틴을 향해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찻잔을 던졌다. 충분히 몸을 돌려 피할 수 있는 거리였지만 저스틴은 그 찻잔을 피하지 않았다. 얼굴에 깨진 파편 조각이 튀어 가느다란 붉은 선이 생긴 채로 저스틴이 웃었다. 우리 이제 결혼했으니까 호칭 정리부터 할까?

 

여보랑 자기 중에 뭐가 좋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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