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화앙투] 해변 쟁탈전
  • 2019. 8. 15. 19:02


  • <해변 쟁탈전>

     

    그러니까, 흑핵을 정화거기까지 말하던 안화는 곧 지휘사가 중앙청 로비 앞에서 어포 앞의 시로처럼 녹아내리는 것을 목도했다. 에어컨. 지휘사의 마지막 한 마디는 세계를 지켜줘, 라거나 너를 구할게, 같은 게 아니라 에어컨을 켜 달라는 단말마의 비명이었다. 흑문도 지구 온난화를 막지는 못 했던 것이다.

     

    갑작스러운 크리스마스가 접경 도시에 찾아 온 이래로 긴 코트와 목도리를 두르고 다녔던 지휘사와 신기사들은 금세 겨울옷들을 처분하고 헐벗기 시작했다. 가슴을 제대로 노출한 세츠에게 그래봐야 너는 상하의가 긴팔이니까 소용없다며 반팔 블라우스를 사재기하던 지휘사는 작열하는 여름 태양 아래에서 순찰을 돌다 말고 엎어졌다. 세계고 뭐고 지금 내가 열사병으로 죽게 생겼는데 장난해? 시로가 옆에서 최선을 다해 마스터 죽으면 안 된다며 궁극기를 써주었지만 얼어 죽을 것 같은 고통과 함께 체력만 깎일 뿐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문명의 이기를 찾아 중앙청으로 돌아온 지휘사는 흑핵을 정화, 라고 말하려는 안화 앞에서 와르르 무너졌다. 됐고 에어컨! 아니면 우리 단체로 휴가라도 가자! 사람이 죽어가는 더운 날씨에도 코트를 고수하던 안화는 그런 지휘사를 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좋다, 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바닷가 근처에 몬스터가 대량 출몰했다고 하더군. 수영복 챙겨라.

     

    중앙청 소속 신기사들은 이렇게 휴가를 빙자한 해변 몬스터 소탕 작업에 투입 되게 되었다. 저기 안화, 나는 그냥 중앙청에서 에어컨만 틀어도 괜찮하고 뜨거운 태양 아래 백사장에서 익어가는 지휘사가 허우적거렸지만 안화는 몬스터를 소탕해라, 하는 기계적인 답만 뱉었을 뿐이었다. 들은 대로 해변에 몬스터가 넘쳐나고 있긴 했지만 덕분에 일반인 접근이 차단되어 바닷가는 수영복을 차려 입은 신기사들을 제외하면 한적한 편이었다. 어디선가 니유와 유우토가 나타나 지휘사의 양쪽 팔을 각각 한쪽 씩 잡았다. 지금부터 해변 쟁탈전 할 거야. 지휘사가 머리 위로 크게 물음표를 띄우며 둘에게 연행 되는 걸 지켜 본 안화는 미리 챙겨 온 서류더미를 꺼내 들었다. 옆에서는 수박이 몬스터 머리통처럼 깨져 백사장을 굴러다니고 있었지만 간만에 찾아 온 평화였다.

     

    <수영복과 불꽃놀이>

     

    선 베드에 앉아 안화가 서류철에 사인을 하고 있는 동안 앙투아네트가 먹을 것을 들고 안화의 옆으로 왔다. 방주의 그림자가 서류의 일부분을 검게 물들이자 안화가 고개를 들어 앙투아네트를 확인했다. 여기까지 와서 일이에요? 앙투아네트가 방주에서 내려 근처 선 베드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안화의 수영복 입은 모습, 조금 기대했는데. 안화는 일처리에 하등 쓸모없다며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평소처럼 코트에 넥타이까지 차려 입은 모양새는 아니었지만 헐벗은 다른 신기사들에 비하면 바닷가와는 지극히 거리가 있는 모양새였다. 바다에 안 들어 갈 거니까. 안화가 대답하자 앙투아네트가 서류더미에서 종이 몇 장을 가져가 살피기 시작했다. , 역시 휴가가 아니라 몬스터 소탕이 목적이었군요, 당신. 니유와 유우토에게 잡혀 여기저기 해변을 누비고 있는 지휘사를 눈으로 쫓으며 앙투아네트가 조금 웃었다. 세계 멸망을 코앞에 두고 휴가를 달라는 것부터가 잘못이다. 안화가 딱딱하게 말하며 앙투아네트의 어깨 위로 비치 타월을 걸쳐주었다. 물에 안 들어 갈 거라면 걸치고 있는 게 좋겠어. 햇빛이 뜨거우니까. 가져갔던 서류를 다시 원래 자리로 돌려두며 앙투아네트가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웃었다. 제 수영복 차림이 적응이 안 되시는 건 아니고요? 안화는 대답 없이 처리한 서류를 선 베드 옆으로 밀어두었다. 앙투아네트가 그 빈 공간으로 제 두 다리를 천천히 뻗었다. 안화의 시선이 앙투아네트의 발끝에서 얼굴로 느리게 올라갔다. 드디어 절 보네요, 안화. 앙투아네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안화는 백사장과 선 베드 사이의 거리를 가늠하더니 손을 뻗어 앙투아네트의 마른 발목을 쥐었다. 평소에는 치렁한 옷가지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부분이었다. 잘 어울려. 한여름의 접촉은 짧게 끝났다.

     

    지휘사가 모든 체력을 잃고 돌아왔을 때는 해가 전부 진 뒤였다. 저녁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늦은 시간이었지만 다들 지치고 배가 고파 안이 차려주는 음식을 허겁지겁 해치웠다. 자정 전에는 불꽃놀이를 할 거래요. 안의 말에 지휘사가 고개를 들었다. 몇몇 신기사들이 자신과 불꽃놀이를 보자고 지휘사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 모습을 후후 웃으며 구경하던 앙투아네트가 옆에 선 안화의 팔을 검지로 꾹 찔렀다. 불꽃놀이는 구경할 거죠? 안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밤이 기대 되네요. 앙투아네트는 여전히 안화가 걸쳐 준 비치 타월을 두르고 있었다. 안화가 대꾸했다. 그렇군. 좀 있다 보지.

     

    <열대야>

     

    여름밤은 더웠다. 정말 끝내주게 더웠다. 신기사들은 늦은 시간까지 잠들지 못하고 시로에게 어포를 바친 뒤 냉기를 쬐고 있었다. 지휘사는 신기사들과 어울려 이리저리 백사장을 뛰어다닌 탓에 별 수 없는 평범한 인간의 체력이 바닥 나 호텔 방에서 완전히 기절해 버렸다. 불꽃놀이는 짧게 끝났지만 흑문 때문에 보라색으로 변한 하늘을 잠시나마 아름다운 색으로 수놓았고 몬스터들과 수박의 잔해가 여기저기 널려있어 보기에 썩 좋은 꼴이 아닌 백사장과 해변에서도 간만에 웃음소리가 넘쳐났다. 모든 것이 꿈만 같은 열대야의 시간이었다. 안화는 앙투아네트와 해변 청소를 명목으로 바닷가 근처를 걸었다. 새벽이 가까워 오는 시간에도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앙투아네트가 안화에게 저기 좀 봐요, 하고 한참 앞 쪽을 손으로 가리켰고 안화는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다. 앙투아네트의 방주가 움직인 것은 순식간이었다. 안화가 상황을 파악할 잠시의 시간도 주지 않은 채 앙투아네트는 안화를 바다로 밀어 넣었다. ? 드물게 안화의 어이없다는 듯한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물에 빠지는 소리가 소란스러움을 더했다. 안화가 허리까지 오는 바다에서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걸어 나오는 동안 앙투아네트는 내내 소리 내어 웃었다. 당신도 물에는 들어가 봐야 하지 않겠어요? 앙투아네트의 말에 안화는 정말이지, 하고 고개만 저었다. 그가 고개를 저을 때마다 바닷물이 방울져 바닥으로 흩어졌다. 앙투아네트가 손을 뻗어 안화의 젖은 머리를 가볍게 털어냈다. 안화의 발목이 아직 바닷물에 잠겨 있었다. 앙투아네트는 그 장면이 어쩐지 평화롭다고 생각했다. 흑문이 열리지 않았더라면 이런 세상에서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런 사소한 상념을 뒤로 하고 둘은 바닷가를 마저 걸었다. 다음번엔 당신도 수영복 챙기란 말만 하지 말고 직접 입고 오는 건 어때요? 앙투아네트가 장난 식으로 묻자 안화가 여전히 물에 젖은 꼴로 앙투아네트를 바라보았다. 매번 하는 대답, 매번 반복되는 열대야의 밤, 그리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여름 속에서 늘 이 순간만 존재할 것 같은 평화. 그러지. 다음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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