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화앙투] 열린 결말
  • 2019. 8. 11. 20:31



  • <설계된 이야기>


     

    앙투아네트는 이번에도 죽을 것이다.

    큰 이야기의 틀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앙투아네트는 죽기 위해 지금까지 살아온 사람처럼 이번에도 죽을 것이다. 자신보다 타인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이 괜찮다는 말을 남기고 지휘사의 앞에서, 또는 다른 사람들의 앞에서 임종을 맞이할 것이다. 이야기는 설계 되었다. 누군가는 지휘사의 선택을 위해서 몇 번이고 반복된 결말을 겪어야 한다.

     

    무슨 생각해요?

     

    안화는 많은 기계장치를 단 채 침대에 누워있는 앙투아네트를 내려다보았다. 보러 왔다면서 무슨 말이라도 좀 해 봐요. 시선이 마주치자 앙투아네트가 안화를 향해 웃어주었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 위로 보랏빛의 선들이 핏줄처럼 드러났다. 보기 흉한가요? 안화의 시선이 닿자 앙투아네트가 손을 들어 제 뺨에 손등을 대었다. 손톱 끝도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신기사는 멸망해가는 세계에서 다른 사람들을 지키고 먼저 죽어 사라지기 위해 태어난 존재. 안화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 생각도. 그냥 쉬는 게 좋겠어. 앙투아네트가 그런 안화를 보며 웃었다. 나는 이번에도 죽겠죠? 내가 사는 경우는 많이 없으니까. 내가 죽으면 그 다음을 잘 부탁해요, 안화. 당신은 내가 정말로 믿을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사람이에요. 안화는 한참동안 앙투아네트의 침대 옆에 서 있었다. 눈물을 흘리거나 슬퍼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침묵으로 가득 찬 시간이 흘렀다. 다음에는, 지휘사가 널 살릴 수 있을 거다.

     

    설계된 이야기.

    구할 수 없는 죽음.

     

    <당신과 함께하는 처음>

     

    새로운 지휘사가 올 거예요. 앙투아네트가 서류를 넘기면서 안화에게 말했다. 히로 혼자만으로는 신기사를 감당하는 일이 버거우니까요. 안화는 알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이 몇 번째지? 안화가 묻자 앙투아네트가 글쎄요, 하고 답을 얼버무렸다.

     

    반복되는 날들이 새로 시작 되었다. 지휘사는 이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했고 앙투아네트는 다시 죽을 위기에 처했다. 안화는 총을 들고 있으면서도 앙투아네트를 구하지 않았다. 그것은 안화에게 주어진 역할이 아니었다. 중앙청에서 자리를 지키고 앙투아네트를 배신하지 않는 업무 보조적인 역할. 히로가 다른 신기사들을 데리고 회의실을 나서자 앙투아네트의 몸이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지휘사가 달려가 앙투아네트를 부축했다.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자리를 안화는 거리를 두고 지켜보았다. 살리는 방법을 알아내는 것은 언제나 지휘사여야 했다. 안화는 주변 인물의 자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앙투아네트를 걱정하는 지휘사에게 상황이 그렇게까지 비참하지 않다고 말해주는 상황이 몇 번이나 반복되고 있더라도 평정을 잃는 것은 그답지 않았다. 지휘사는 앙투아네트를 살릴 수 있을 것처럼 말하고 나가서는 매번 실패하거나, 앙투아네트를 우선순위로 두지 않아 그녀를 죽게 만들었다. 안화는 다시 앙투아네트의 침대 옆에 섰다. 앙투아네트가 말했다. 괜찮아요. 우리 이제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잖아요. 이번에도 나는 죽겠죠. 내가 사는 일은 드물잖아요. 설계된 이야기 속에서 안화는 어떤 우발적인 행동이 얼마나 세계와 지휘사에게 영향을 미치는 변수가 될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다음이라는 것이 오지 않는다면, 세상이 여기서 정말 끝나버리고 이번에야말로 앙투아네트의 죽음이 마지막이라면. 안화는 앙투아네트에게 손을 뻗었다. 앙투아네트의 갈색 눈이 안화의 장갑 낀 손을 응시했다. 당신이 이러는 건 처음이네요. 안화의 손이 닿기 전에 앙투아네트가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말아요, 안화. 우리는 언제나 우리 역할에 충실해 왔잖아요. 안화가 몸을 숙였다. 실핏줄 같은 보라색의 결정들이 앙투아네트의 얼굴 가장자리를 뒤덮고 있었다. 앙투아네트가 애써 웃었다. 그러지 말아요. 안화는 앙투아네트의 콧등에 짧게 입 맞췄다. 설계된 이야기가 무너지지 않을 만큼의 변수. 순식간에 끝나버린 당신과 함께하는 처음. 안화가 말했다. 다음에는, 지휘사가 너를 살릴 수 있을 거다.

     

    앙투아네트는 이번 회차에서도 죽었다.

    안화는 이 정도의 변수로는 아무것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열린 결말>

     

    지휘사가 앙투아네트를 살렸다. 축하연에 앙투아네트가 방문했다. 연일 이어지는 과로와 히로를 막아야 한다는 막중한 업무 때문인지 얼굴은 수척했지만 그녀는 눈에 띄게 상태가 호전되었다. 모든 구역의 흑핵 정화를 축하하는 축하연에서 애써 찾은 희망으로 웃고 우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안화가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네가 살았군. 앙투아네트가 웃었다. 그러게요. 이번에는 살았네요. 앙투아네트가 잔에 담긴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보랏빛으로만 가득 차 있는데도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네요.

     

    끝이 다가왔다. 선택의 순간에 지휘사는 앙투아네트가 아니라 세상을 구했다. 안화는 지휘사의 선택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일상을 찾을 수 있었다. 안화는 한 자리가 비어있는 게 더 익숙해진 중앙청 로비에 선 채로 밝아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세상은 이제 보랏빛이 아니라 검푸른 색의 어둠을 찾았다. 지휘사는 앙투아네트를 살렸고 그녀의 의지를 이어받아 세상을 구하는 대가로 그녀를 다시 죽였다.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네요. 안화는 앙투아네트의 말을 기억했다. 앙투아네트는 이 다음에도 계속해서 죽을 것이다. 다음에는, 다음에는, 다음에는.

     

    어느 정도의 변수까지 세상은 유지될 수 있는가?

     

    다시 처음. 새로운 지휘사에 대한 보고를 받으며 안화는 장총을 장전해두었다. 앙투아네트가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보았으나 그는 모호하게 어떤 준비를 한다고 대답하는 것이 전부였다. 앙투아네트는 그런 안화를 보며 말했다. 그러지 말아요.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안화는 이번에도 죽음을 각오하는 그 갈색 눈을 마주보았다. 나는 시험해보고 싶을 뿐이야.

     

    그러지 말아요.

     

    중앙청 회의실에서 앙투아네트는 다시 히로와 대치하게 되었다. 지휘사를 보호하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던지는 앙투아네트를 지켜보며 안화는 총을 들었다. 변수의 출현에 이야기는 잠시 다른 방향으로 튀었다. 다른 신기사들이 나서서 막기도 전에 안화는 방아쇠를 당겼다. 소음이 적은 장총이 큰 반동으로 휘었다. 히로가 바닥으로 쓰러지자 앙투아네트가 안화를 질린 얼굴로 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요, 하는 질책 어린 표정이 잠시 떠올랐다 사라졌다. 지휘사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마치 이런 상황은 이전에 없었다는 걸 깨닫기라도 한 사람 같았다. 안화는 앙투아네트를 살렸,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지.

     

    히로의 편에 섰던 7인대 중 하나가 앙투아네트를 공격했다. 변수가 하나 일어나자 다른 변수가 연속적으로 터져 나왔다. 중앙청 회의실은 난투장으로 변했다. 지휘사에게 쏟아지는 공격을 막기 위해 앙투아네트는 다시 무너져가는 몸을 버텨내며 자리에 섰다. 안화는 이번에도 앙투아네트가 죽을 것을 직감했다. 엉망진창으로 뒹굴며 싸우는 신기사들 사이에서 안화는 바른 자세로 서 다시 장총을 장전했다. 그리고 앙투아네트를 겨눴다. 지휘사가 그런 안화를 발견하고 어째서? 하고 소리쳤다. 에뮤샤가 안화를 막아섰다. 앙투아네트의 갈색 눈이, 아직은 보랏빛 실선들이 삼키지 못한 흰 얼굴이, 안화를 마주했다. 앙투아네트가 웃었다. 다음이 있다고 확신하는군요. 이건 너무 큰 오류예요. 안화도 웃었다. 나도 알아. 지휘사가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고 앙투아네트가 회의실 바닥으로 쓰러졌다. 왜 이러는 거야? 회생의 가능성조차 잃은 채로 차게 식어가는 앙투아네트의 몸을 안아들며 지휘사가 안화를 향해 따져 물었다. 안화가 총을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지금의 너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다음에는 네가 그녀를 살리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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