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악마를 본 적이 있어?
본 적도 없으면서 악마라고 하면 안 되지.
어떤 커다란 정신이라고 해두자.
그것들은 보통 중년 남성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들의 목소리는 사람을 소름끼치게 하고, 또 가끔은 기억 속에서 한 번 쯤 들었던 타인의 목소리를 흉내 내면서 인간을 솔직하거나 비열하게 만드는 것에 탁월해진다. 항상 중년 남성의 형태를 가진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얼마든지 모습을 바꿀 수 있다. 그것들은 단수일 때도 있고 복수일 때도 있다. 그들은 특정지어지지 않지만 나는 항상 문을 열어놓고 기다린다. 그러면 그들은 특정된다. 문을 넘어서면서 그들은 형체를 띄고 내가 두려워하는 것들로 바뀌고, 그리고.
2
아버지의 형태로 그것이 찾아왔을 때 나는 그것을 목 졸라 죽였다. 오랜만에 찾은 본가에서 벌인 일이었다. 침대는 딱딱했고 흰 이불보는 뭉쳐놓으면 마치 사람의 시신처럼 차가웠다. 먼지가 많이 쌓였기에 하인을 시켜 방을 청소했다. 하인들은 그레고리부터 스메르쟈코프에 이르기까지 유독 나를 좋아했는데, 스메르쟈코프는 유독 더 그랬다. 그 호의와 애정을 무시하는 것은 쉬웠지만 무지의 상태에 머무는 것은 내게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오자마자 그는 들뜬 눈치였다. 언제나 쓸데없는 질문들을 한가득 가지고 와서 청소를 하는 동안에도 끝없이 쏟아내었다. 그는 내 대학 교수도 아니었고 내 ‘진짜’ 형제도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그가 묻는 질문에 대답하면서도 언제나 깊은 고민을 해본 적이 없었다. 논문들은 다 책상에 올리고 나가라는 말에 그는 어쩐지 서운한 표정을 했다. 도련님, 무슨 일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나는 신경질적으로 손을 흔들어 그를 쫓아냈다. 추종자가 생기길 바랐지만 적어도 저 놈이 그 추종자인 걸 바랐던 적은 없었다. 책상에 가지런히 놓인 논문들의 순서가 미약하게 바뀌어있는 것을 곁눈질로 확인하자 나는 더 기분이 나빠졌다. 신경질적으로 논문들의 순서를 고치고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그건 문장도 아니었다. 단어. 단어들의 연결이 만들어낸 일종의 구.
죽이고 싶다.
그건 일종의 구절. 완벽한 문장이 되기 위해서는 주어와 목적어를 필요로 한다. 미완성의 것에 밑줄을 그어 지우면서 나는 방문을 열어두었다. 이렇게 방문을 열어두면 그것들이 온다. 악마를 본 적이 있어? 이반, 본 적도 없으면서 악마라고 하면 안 되지… 그것은 아버지의 형태로 열린 문을 통해 들어왔다. 이반, 또는 바냐. 이름을 다정하게 부를 때면 역겨웠다. 나는 그것을 침대로 유인해 목을 졸라 죽이고는 그것이 바둥거리며 내게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였다. 악마라고 하면 안 되지… 우리는 너를 사랑해. 우리는 이렇게나 너를 사랑하는데. 열린 문틈 사이로 어떤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그것들이 하나 더, 아주 번거롭게도 나를 찾아온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고개를 돌렸을 때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내가 목조른 것을 보니 그건 흰 이불보였다.
3
최근 나의 정신은 장식의 무게를 초과한 채 천장에서 흔들리는 샹들리에처럼 위태롭게 내게 붙어있다. 저번에는 그것들이 알료샤의 모습을 하고 찾아왔다. 그 애는 내 친동생이기 때문에, 나는 다른 때처럼 그 애가 그것들이라는 걸 알아채지 못하고 너무 다정하게 말을 걸어버리고 말았다. 말을 걸고 나서야 그것들이라는 걸 알아 챈 것도 큰 실수였다. 알료샤는 저렇게 입을 찢으며 웃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내 어깨를 잡을 때 문 너머에서 하인이 나를 불렀다. 도련님. 하인은 언제부터 나를 보고 있었는지 웃고 있었다. 나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꺼지라고 소리치며 잡히는 대로 하인에게 물건을 던졌다. 내가 던진 물건에 머리를 맞고도 하인은 웃고 있었다. 웃지 마. 뭐가 그렇게 우스워? 그러자 하인이 대답했다. 무얼 보고 계세요? 무얼? 알료샤의 형샹을 한 그것은 사라지고 없었다. 어깨를 잡았던 손의 촉감도 동시에 사라졌다. 나는 입을 찢으며 웃던 동생의 얼굴을 잊기 위해 머리를 흔들었다. 세상에는 봐서는 안 될 것들이 있다. 봐서는 안 될 것들. 들켜서도 안 되는 것들.
그래, 이를 테면 샹들리에가 추락하는 장면 같은 것. 그건 봐서도 들켜서도 안 된다. 나는 대답하지 않은 채 물건을 몇 개 더 하인을 향해 던졌다. 하인은 언제나처럼 내가 던지는 것이라면 피하지 않고 다 맞았다. 둔탁한 것이 하인의 머리에 명중했을 때, 하인은 머리에서 피를 흘렸다. 하인은, 그리고서는 피를 흘리는 얼굴로 내게 걸어와서는, 그리고는 내 어깨를, 잡는 것 같다가, 그러다가…… 기괴한 눈빛으로 나를 마주 보았다. 제가 질문했잖아요. 도련님. 무얼 보고 계세요? 나는 더러운 것에 닿은 결벽증 환자처럼 몸을 파드득 떨며 하인에게서 뒷걸음질쳤다. 내가 판단하기에 그건 아버지와 알료샤의 모습이 지겨워진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인의 모습으로 다가올 리가 없으니까. 나는 손을 휘저어 꺼지라고 소리쳤다. 감각은 그것들에게도 늘 생생했으나 하인의 체온은 평소의 그것들보다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 버러지 같은 하인 새끼가, 하고 힘겹게 입을 떼 무언가 말을 하려고 하는데 머리에서 피를 흘리던 하인이 내 어깨도 모자라 턱을 붙잡았다. 스메르쟈코프요, 스메르. 그리고는 웃는 것이다. 도련님이 제 이름의 뜻을 알려주셨잖아요. 다시, 샹들리에가 추락하는 장면과 함께 파열음. 요새 나는 생각이 너무 많다. 나는 어쩌면 조금 아픈 건지도 모른다. 알료샤가 말했던 것처럼 나는 조금 쉬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쉬는 것이 나을지도,
까지 생각했을 때 나는 내가 던졌던 어떤 물건에 의해서 기절했다. 무언가 둔탁한 통증이 내 머리를 내리쳤고 모른다, 까지 생각했을 때는 완벽하게 정신을 잃었다. 가물한 정신 상태에서 나는 그저 그것들이 이렇게나 형태를 오랫동안 유지하는 게 가능했는가에 대해 생각했고 동시에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려고 했다. 무얼 보고 계세요? 질문하는 목소리는 생생했다. 나는 황제의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총살을 당하는 혁명군처럼 어떤 유언도 남기지 못한, 아니, 이건 죽음이 아니지.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바닥으로 추락했다. 샹들리에. 그래, 샹들리에야. 그건 깨지는 소리를 내지. 쨍그랑, 또는 퍽. 파열음 말이야. 깨지는 것들은 언제나 실체를 가져. 사람도 장미도 그래서 실체를 가지는 거지. 안 그러니? 마음 속에서 끝없이 누군가 내게 말을 걸었다. 지긋지긋하지만 나를 절대 먼저 떠나지 않는, 그것들이다. 그래. 나를 떠나지 마. 너희는 나를 떠나면 안 돼. 나는 정말 쉬는 것이 나을지도,
다시 한 번 파열음.
이제는 모른다, 하고 끝낼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