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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봄이 오면 벚꽃이나 보러갈까?
좋지. 벚꽃 아래에서 술이나 거하게 마시자고.
햄릿에 보면 그런 구절이 나온다. 햄릿이 그의 어머니인 거트루트에게 하는 대사인데, 약한자여. 그 이름은 여자이니라. 하고 말하는 구절이 나온다. 어렸을 적의 나는 그 말이 정말이라고 생각했다. 약한자여. 그 이름은 여자이니라. 그래. 사실 딱 보기에도 대부분의 여자들은 남자들에 비해 체력적으로나 신체적으로는 약해보였으니까. 내 엄마도 늘 그렇게 말했다. 제야야. 나중에는 엄마처럼 남편 잘못 얻어서 힘들게 고생하지 말고 좋은 남자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엄마의 말이 으레 그렇듯이 딸을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묘한 기분으로 엄마의 말에 착한 아이답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요. 어째서.
저는 좋은 남편을 만나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여자인데요.
*
스물 아홉 살의 봄이 찾아왔다. 늘 그렇듯이 내게는 별 것 아닌 새로운 해였다. 죽지 않는 한 아침은 계속오고 날은 반복되고 봄도 겨울도 여름도 가을도 끝없이 순환한다. 내게 있어서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그 정도의 의미를 가지는 것 뿐이었다. 고교시절 친구와의 약속이 있었던 날이었다. 이미 결혼을 해서 한 아이의 엄마가 된 그녀가 나를 만나자마자 호들갑스럽게 어머 제야야, 너는 어쩜 그렇게 변한게 없니. 하며 달려와 나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에게서 나는 예전과는 다른 짙은 향수 냄새에 머리가 조금 아팠지만 나는 미소지었다. 그래. 너도 달라진게 없다. 그녀가 원할만한 대답을 해놓고 그녀의 얼굴을 살피다가 나는 속으로만 하고 싶은 말들을 작게 읊조렸다. 많이 변했네. 너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스물 아홉이라는 나이가 어린 나이가 아니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100세 시대이다, 뭐다 하지만 결혼 적령기의 여자는 적어도 우리 나라의 인식에서는 20대 중 후반이었다. 스물 여섯 쯤 부터 엄마를 비롯한 주변으로의 연애와 결혼 독촉을 얼마나 받았던가. 아마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일자리를 구했기에 망정이지 일을 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주변의 독촉은 지금의 두 배가 되어 나를 덮쳐왔을 것이었다. 오늘 만난 고교 시절 친구만 해도 사귀는 사람은 있니, 하는 물음을 만나지 20분도 되지 않아 금세 내게 물어왔으니까. 제야야. 너 나이 서른 넘으면 퇴물이야. 얘. 하고 속닥이던 그녀의 몸에서 짙은 향수 냄새가 나 머리가 아팠지만 나는 어쨌거나 그녀의 친구였기에 어설프게 웃어주었다. 사귀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결혼을 생각해보지 않았을 뿐.
꼭 남편이 있어야 해?
목구멍 끝 까지 그 말이 차올랐지만 나는 기어코 그 말을 내뱉지는 않았다. 조금 더 어렸던 시점에는 이런 말을 내뱉어 주변으로부터 설교와 비슷한 잔소리를 많이도 들었던 것 같지만 나이가 들 수록 내가 내뱉는 모든 말들이 그들에게는 그저 결혼하지 못한 노처녀의 하등한 변명 정도로 들릴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나는 말없이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대부분의 대화는 내가 아니라 내 친구가 주도해 흘러갔다. 나는 할 수 있는 말이 얼마 없었다. 응. 아니. 그래. 잘 지낸다니 다행이다. 딸은 잘 지내고? 남편은?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
친구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 나는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거하게 취한 사람처럼 변기통 앞에서 헛구역질을 했다. 속이 상한 것은 아니었다. 그 말이 맞으니까. 여자는 결혼을 해야하고 서른이 넘으면 퇴물이고... 솔직히 부정을 할 수는 있지만 사회 통념 상 저 말보다는 결혼하지 않는 내가 더 잘못 되었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다. 약한자여. 그 이름은 여자이니라. 세익스피어가 살던 시대에서 몇 백년이 흘렀는데도 나는 약한 자였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약한 자였다.
*
한씨에게 연락이 온 것은 꽤 오랜만이었다. 나는 어쩐지 아픈 속을 달래려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마시다가 한씨의 전화를 받았다. 멋진 언니. 술 한 잔 어때? 그녀의 전화는 꽤 좋은 타이밍에 걸려온 전화였다. 속이 아팠지만 술을 마시고 싶었으니까. 술을 잘 마시는 것은 아니었다. 아주 못 마시지도 않지만 한 병 정도면 금방 취해 좋지 않은 주사, 그러니까 평소에는 절대 보이지 않던 눈물을 보여버리고 마는 것이다. 엉엉 울거나 훌쩍 거리면서 숨겨왔던 진심을 토해내는 것을 나는 좋아하지 않았다. 몸도 안 좋은데 술 같은 걸 왜 마셔. 가끔 사람들이 권유하는 술잔에 대고 나는 그렇게 웃으며 완곡한 거절을 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한씨의 전화는 너무 타이밍이 좋아서, 내가 너무 울고 싶었기 때문에, 나는 그녀에게 흔쾌히 술을 마시러 가겠다고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래도, 울지 말아야지.
울기에는 나는 너무 나이가 들어버린 것이다.
스물 아홉의 여자는, 눈물 조차도 아껴야 하니까.
*
- 열 아홉살 때였나.
수능 쯤이었어. 한씨. 나는 뭐 공부에 크게 미련도 없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도 없는 학생이었으니까 다른 애들처럼 크게 스트레스 받지는 않았지. 그런데 나보다 한 학년 낮은 학급에서 제일 공부를 잘한다던 여자애가 학교 뒤편 소각장에서 혼자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서 담배를 피고 있더라고. 나도 놀랐고 내가 자기를 발견한 걸 안 그 얘도 놀랐어. 그 애가 다급하게 담뱃불을 바닥에 비벼 끄는 걸 봤지. 나는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어. 그러고 또 한참의 침묵, 그리고 그 애가 나한테 담배를 하나 건네더라. 언니. 그 쪽도 피울래?
나는 술병에 술을 채우면서 담배를 피는 한씨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담배를 손에 쥐었고 피지 않고 불을 붙여 태우기만 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교실로 돌아가 우리는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지냈다. 나는 필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그 여자애와 아무렇지 않게 말을 했고 그 여자애도 늘 그렇듯 모범생처럼 행동했다. 어느날 부터 그녀가 학교를 나오지 않았고 자퇴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게 끝이었다. 나는 이제 그 애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딱 한 번 그 여자애를 잠들게 해준 적이 있긴 했지만, 꿈의 내용이 너무 슬퍼서 나는 곧 그녀를 깨울 수밖에 없었다. 담배를 피우고, 모범생이며, 그리고.
그리고, 약한 여자였던 그 여자애.
나 취했나봐. 별 같잖은 이야기를 하네. 한씨. 나 울면 화장 다 지워져서 추하니까 두고 가도 괜찮아.
*
나는 그 날 결국 취해 울었다.
마스카라가 번져 검은 눈물이 흐르는 것 같았지만, 한 씨는 그저 내 옆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담배를 피고 있을 뿐, 나를 두고 가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물었다.
아가씨. 벚꽃이 피면 나랑 구경가지 않을래.
나는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것과는 달리 펑펑, 소리내어 울었다.
*
- 제야니?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아.
밥은 잘 챙겨 먹고 있고? 반찬 가져다 준 건 다 먹었어? 제야야. 별 건 아니고 저번에 그 아랫집 아줌마 딸이 벌써 결혼했다더라. 엄마가 걱정되서 그래. 연애하는 사람 있다면서. 결혼은 생각없대? 뭐 남자친구 엄마한테 소개 좀 시켜주고 그래. 엄마가 설마 네 남자친구한테 결혼하라고 부담주고 그러겠니... 얘. 또 왜이렇게 대답이 없어. 너 내년이면 서른이잖아. 시간 금방간다? 여자는 서른 넘으면,
퇴물이야.
꿈을 꾸지 못하게 된 것은, 잠에 들지 못하게 된 것은, 언제 부터였을까.
나는 스스로를 재우지 못해 알았어요. 엄마. 하고 얌전히 전화를 끊고 아픈 머리와 퀭한 눈으로 다시 밤을 지새우는 것이었다. 그래. 저도 알아요. 저도 제가 결혼 해야하고 사랑 해야하고 꿈보다는 현실을 쫓을 나이라는 것을 알아요. 엄마.
*
약한자여,
그대의 이름은 여자이니라.
*
그래도, 한 번도 꿈 꾸지 못하고 시들기에는
29살은 아직 어리잖아요.
만개한 벚꽃을 다 보기 전에 이미 시들었다고 말하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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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세의 봄.
단 한 번, 꿈 꾸기를 소망하며
나는 전화가 끊어진 수화기 앞에서 다시 또 울었다.
29세의, 몇 번 째일지 모를 눈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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