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방 (完)
  • 2020. 2. 12. 21:13


  • 나방


    아이를 증오하는 엄마가 되지 않기 위해 그간 내가 해 왔던 모든 노력은 사랑이라는 광기로 내게 되돌아왔다. 감정은 진실의 눈을 달고 있다. 아무리 스스로 속이려고 해도 언젠가 주인의 목을 물어뜯으며 거짓에 대한 벌을 내린다. 아들들은 내 전부였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종종 소유와 사랑의 개념을 혼동한다. 한 번도 누군가를 사랑한 적 없냐고 묻는다면 나는 부정의 말을 꺼낼 테지만 이제 와서 누구를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침묵할 것이다. 내 배에서 낳았다고 해서 경훈이 짐승이 아니라고, 지훈이 비겁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나 자신을 속이는 일이다. 마치 남편을 여전히 열렬한 마음으로 사랑한다고 믿으며 내 인생의 절반을 견뎌냈던 것처럼.

     

    새벽 6시 경, 나는 장바구니를 들고 시장으로 나갔다. 부지런한 시장 사람들이 장사를 시작하기 위해 물건을 가판대에 펼쳐놓고 있었다. 평소만큼의 시간이 내게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시장에서 가격을 따지지 않고 손에 잡히는 대로 고기며 채소 따위를 구매했다. 국을 끓일 때 쓸 육수까지 허겁지겁 사고 나자 항상 나를 불러 세우는 건어물집 주인이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이렇게 일찍 시장에는 웬일이야. 보통 점심 다 지나고 나오잖아? 그렇게 묻는 주인에게 나는 아무 대답도 없이 미소만 지어 보였다. 왜 그렇게 급해, 오늘 따라? 건어물집을 스쳐 지나가려는데 굳이 굳이 그녀가 내 손목을 잡아채었다. 왜 그랬는지 나는 덜컥 겁이 나고 소름이 끼쳐서 평소답지 않게 그녀의 손을 탁 뿌리쳤다. 우리 둘 사이에 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죄송해요, 라고 사과부터 뱉었고 주인은 반 걸음 물러선 채로 괜찮다고 말했다. 누가 와요? 급해 보이네. 나중에 봐. 나는 그녀가 가진, 누구에게든 쉽게 나중에 보자고 할 수 있는 저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가 부러웠다. 두 걸음을 저는 것처럼 느릿느릿 옮기다 결국 뒤를 돌아 다시 한번 말했다. 정말 죄송해요. 건어물집 주인이 떠나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중에 생각해 보면, 그녀가 나를 의심한 유일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과 조금 떨어진 철물점에서 나는 청테이프를 두 개 샀다. 뭐에 쓰시게요? 철물점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는 내게 용도를 물었고 나는 동문서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냥요, 라고 대답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내게 두 번 묻지 않은 채 무관심하게 청테이프의 값을 불렀다. 철물점과 가까운 주유소에서는 휘발유를 두 통 구매했다. 뭐에 쓰시려고요? 하고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나를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았다. 남편이 차를 새로 사서요. 예비용이에요. 한 번도 내가 그렇게 거짓말을 잘 한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철물점 주인과 마찬가지로 아르바이트생 역시 나를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너무 약하고 힘없는 중년 여자일 뿐이니까. 그들의 상상 속에서 나는 피해자나 희생자일 수는 있어도 가해자가 될 수는 없었다. 현금으로 돈을 지불하고 휘발유 두 통을 겨우 겨우 들자 아르바이트생은 오히려 날 걱정해주기까지 했다. 그거 두 통 다 들고 가실 수 있으시겠어요? 다른 짐도 많으신 거 같은데. 팔이 떨어질 것처럼 무거웠고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나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아르바이트생은 내가 도움을 거절하자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냥 주유소 오셔서 주유하는 게 빠르실 텐데, 남편 분도 참. 나는 짐 때문에 절뚝이며 걸음을 옮기면서도 누군가 나를 붙잡아 세우지 않을 거라는 강한 믿음이 들어 웃어버렸다. 아파트 현관 비밀번호를 잊지 않기 위해 주문처럼 8자리의 숫자를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내가 사는 아파트 앞에 섰을 때 나는 다행스럽게도 현관 비밀번호를 잊지 않았으나, 망연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자리에 멈춰 22층을 올려다보았다. 불이 꺼져 있었다. 난간만 어렴풋이 보이는 베란다에는 아직 부패가 시작되지 않은 아진의 시체가 누워있을 테였다.

     

    졸아드는 육수에 물을 붓고 대파를 썰어 넣은 다음 졸피뎀을 아주 조금씩 섞어 넣었다. 약의 쓴맛이 바로 느껴지지 않도록 평소보다 세게 간을 했다. 어제 사람이 이 집에서 죽어버렸으니 당장 오늘 식탁에 올라 올 음식에 불평불만을 토로할 사람은 없을 테였다. 이 집의 모두는 어제 저녁 일어난 일들과 앞으로 일어날 일을 명확하게, 또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부지런을 떨며 새로 담은 무생채에도, 경훈이 좋아하는 반찬인 불고기에도 조금씩 졸피뎀을 넣었다. 나는 그들이 이 지경이 돼서도 같이 식사하지 않는 나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세 세트의 수저를 놓고 정성을 다해 그릇으로 반찬들을 옮겨 담았다. 깨우지 않아도 일어난 남편이 내가 음식을 차리는 걸 보더니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나를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너무 속상해 하지 마, 여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위로와 애정이 담긴 남편의 말이 날 괴롭게 했다. 나는 자백하고 싶었다. 내가 벌이고자 하는 추악한 일과 그간 당신만 행복하다고 믿었던 우리의 결혼 생활 같은 것들에 대해서 남편에게 전부 털어놓고 싶었다. 그러나 남편이 불륜을 저지른 나를 더 이상 믿지 못하게 된 것보다도 한참 전에 이미 나는 그를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어쩌면 이 표현은 틀린 것일지도 모른다. 한 번도 믿어본 적 없는데 어떻게 믿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남편에게 지훈이와 경훈이를 깨워 달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평소와 다르게 군말 없이 일어나 부엌으로 왔고 내가 지난 아침 준비의 흔적들을 세제로 씻어내는 동안 모두 수저를 들었다. 간만에 가족들이 둘러앉은 식탁 자리인데도 어색한 침묵만이 자리를 지켰다. 아무도 먼저 무슨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나는 젖은 손을 마른 행주로 닦아내며 몸을 돌려 국을 떠먹고 있는 경훈이를 바라보았다. 누구든 평소처럼 내 음식에 대해 불평을 했다면 무엇인가 달라질 수 있었을까? 나는 세 남자를 향해 말했다. 많이 먹어. 더 있으니까. 가족들에게 졸피뎀을 먹이는 것이 이렇게 쉬울 수 있다는 게 우스웠다. 지훈이나 남편이 경훈이를 두려워하거나 경계하는 것만큼, 경훈이가 아진을 껄끄러워 했던 것만큼만 내게 어떤 공포를 느꼈던 적 있었더라면 그들은 이렇게 쉽게 수저를 들 수 없었을 것이다. 가족 식사는 내가 함께 자리하지 않았음에도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끝이 났다. 아들들은 모두 잘 먹었다는 인사 없이 방으로 들어갔고 수저를 내려놓은 지 오래인 남편과 나 둘만이 부엌에 남았다. 남편은 한참이나 나를 쳐다보더니 자비를 베푸는 왕처럼 당신도 와서 먹지 그래, 하고 내게 말을 건넸다. 나는 입맛이 없다고 말을 얼버무리며 남편도 방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렸다. 나는 내가 차린 식사에 졸피뎀이 들어있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들과 함께 같은 자리에서 식사를 하기에는 너무 많은 기회가 지나가 버린 뒤라는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 남편이 안방 문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했을 때 나는 음식물 쓰레기통에 남은 반찬들을 죄다 쏟아부었다. 뜬 눈으로 부엌에서 밤을 새웠던 것과 다르지 않은 자세, 그리고 이상할 정도의 초연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동시에 끓어오르는 충동과 흥분감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거친 숨을 진정시키며 나는 식탁 의자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국을 끓일 때 열어 두었던 가스 벨브는 아직 잠그지 않았고 철물점에서 산 청테이프는 세 개의 문 가장자리를 매우기엔 충분했다. 나는 그들이 평안한 잠에 들기를 기다렸다. 이게 내게 왕처럼 자비를 베풀어 주었던 사내들에 대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답례였다.

     

    지금까지 나는 나 자신과 많은 사람들을 잘 속여왔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내가 행복한 사람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적어도 아진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나의 삶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나와 내 가족의 인생이, 우리의 보금자리가 파멸로 치닫은 것이 오로지 머리가 터진 채 베란다에 누워있는 아진의 탓이라고만 할 수 있는가? 아진이 망친 내 인생은 극히 일부분이었다. 몇 달 되지 않는 시간 동안 그는 무른 복숭아에 침투한 벌레처럼 내 속까지 파먹었으나, 이미 복숭아에 벌레가 생길 정도로 무르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아진의 몇 배, 또는 몇십 배의 시간 동안 내 남편과 아들,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내 주변인들이 내게 광기가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나는 백치처럼 굴며 그것을 끊임없이 무시하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내 세대에서 영리한 여자로 살기를 결정한다는 것은 좋은 엄마나 아내는 될 수 없다는 뜻과 일맥상통했다. 한 걸음 떨어져 보면 왕과 시녀 사이에 불과한 이 가족 관계를 계속해서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적어도 아내와 엄마의 입장에 있는 여자는 제정신이어서는 안 됐다.

     

    누가 불이고 누가 나방이었을까?

    타 버리고 나면 그것은 결국 아무 의미도 없다.

     

    내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우리 가족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나는 휘발유 통을 열어 아이들의 방 앞과 안방에 골고루 뿌렸다. 이런 짓을 하는 와중에도 혹시나 불이 다른 집에 옮겨붙을까 봐 현관문을 이중으로 잠그고 안에서 청테이프를 문 가장자리마다 꼼꼼하게 감았다. 이렇게 된 마당에도 남을 신경 쓰는 내가 우스웠다. 계획대로라면 아진도 베란다에서 안으로 들여놓을 심산이었으나 도저히 죽은 성인 남자의 시신을 혼자 안으로 끌어들일 체력이 되지 않아 아진만큼은 다 태우지 않고 남겨두기로 했다. 애초에 그는 이방인이었으니 그게 우리의 결말에 잘 어울리는 끝인지도 모른다. 첫아들은 유독 엄마를 닮는다는 말이 있던데 생각해 보면 경훈이의 그 짐승 같은 습성은 내게 물려받은 것일지도 몰랐다. 광증은 보통 유전이라고 했으니까. 라이터가 없어 부엌 서랍을 한참 뒤적여 몇 년 전에 중국집에서 받은 것 같은 성냥 한 갑을 찾았다. 휘발유를 골고루 뿌렸는지 확인한 뒤 반 통 정도 남은 휘발유를 전부 내 위로 들이부었다. 기름 냄새가 역하게 느껴져 헛구역질이 났다. 눈물이 날 줄 알았는데 아무렇지도 않았다. 심장이 뛰었지만 두려워서는 아니었다. 나는 용서받지 못할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성냥을 꺼내 불을 붙이려고 하는데, 경훈이와 지훈이 중 누가 깼는지 방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엄마! 목소리를 들으니 경훈이었다. 나는 휘발유에 젖은 발을 질질 끌고 경훈이의 방문 앞에 섰다. 문 열어, 하고 신경질적으로 외치며 부술 듯이 쾅쾅거리는 소리를 내는 폭력적인 문 너머에 내 아들이 있었다. 내가 내 삶에서 가장 긴 시간을 들여 키워 낸, 사랑하는 나의 아들. 끝없이 타인을 상처 입히고 결국에는 죽이기까지 하는 나의 핏줄. 나에게는 책임이 있었다. 엄마로서 아이들을 지켜야 할 책임. 그리고 인간으로서 사람들을 내 아들들로부터 지켜야 할 책임. 나는 떨리는 손으로 성냥에 불을 붙였다. 한 개비는 실패했고, 두 개비째에서야 불이 붙었다. 문고리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지만 청테이프 때문에 문이 열리지 않았다. 손잡이가 덜걱거리며 빠지고 그 조그만 문구멍으로 경훈이가 눈을 들이밀고 문앞에 선 나를 발견했다. 엄마. 경훈이가 그 작은 틈으로 내게 물었다. 죽으려고? 나는 대답하는 대신 타오르는 성냥을 내 발밑으로 떨어트렸다. 순식간에 기름과 천을 타고 옮겨붙는 홧홧한 뜨거움에 몸이 발작을 일으킨 것처럼 퍼드득 거렸다. 내게 붙은 불이 휘발유를 타고 경훈의 방문에도 옮겨붙었다. 문구멍 너머로 보이던 경훈의 눈은 일렁거리는 화기에도 멀어지지 않았다. 마치 나방에 불을 붙이고 그걸 삼삼오오 모여 지켜보던 학생들처럼, 경훈이는 불타 죽어가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불길과 함께 경훈이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속으로 삼켰다. 아니, 죽이려고. 너희는 내가 이렇게 뜨거울 거라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지? 재와 연기 때문에 희미해진 시선으로 불이 붙어 끊임없이 타오르는 내 몸을 바라보았다. 

     

    대답해 줘.

    이제 누가 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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