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만>
아만.
어떤 기도의 끝맺음과 같은 이름으로 아만은 평생을 살았다.
그녀에게는 열렬한 믿음이 있었다. 그런 믿음이 없었다면 그녀는 자살했을 것이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녀는 많은 것을 가졌고 그것을 지키지 못 했다면 죄책감에 죽었을 것이다. 그녀는 사랑하는 타타니르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다. 아이는 축복이었다. 신에 대한 믿음이 그녀와 그녀의 주변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이의 눈은 보라색으로 빛났다. 타타니르는 참담해 했지만 아만은 그런 타타니르를 위로하며 말했다. 이 아이가 우리를 구원할 거야.
아만은 성장하는 사리암을 사랑했다. 사리암이 자신과 타타니르, 그리고 전원을 구해줄 것이기 때문에. 노예로 비참하게 살지 않을 수 있는 기회를 자신의 아들이 가져다 줄 것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내 아들. 너는 영웅이 될 거야. 우리를 구하는 영웅이 될 거야. 사리암은 그런 아만의 손에서 남을 도와주기 좋아하는 밝은 아이로 자랐다. 모자 사이의 유대는 깊었고 아만은 꽤 좋은 양육자였다. 그녀의 사랑은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널 사랑해. 우린 너를 믿어. 너는,
내 아들. 내 사랑하는, 소유격이 붙은 말들을 뱉으며 아만은 생각했다. 그래도 네가 날 구할 걸 알아. 그녀의 아이는 너무 많이 자라 있었다. 표정은 전과 같이 밝았지만 죽든가, 라고 말하는 아들에게서 아만은 어떤 차가움을 발견했다. 아이는 자신의 손을 떠나 버렸다. 바라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덕분에 그녀는 전원에서 잡혀 와 미로에 묶여 죽음 직전으로 몰렸고 운이 좋아 산다고 하더라도 노예의 삶을 살게 될 것이 뻔했다. 이건 자식을 교육 시키는 것에 실패한 부모의 탓이다. 아만은 그렇게 생각했다. 사리암은 망설임이 없었고 아만은 아들을 구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넌 도망치면 안 돼. 넌 우리를 위해서, 용서를, 빌어, 끊기는 말들 속에서 아만은 웃었다. 그래, 사랑한다. 네가 어떤 사람이든지, 난 널 사랑해. 나의 이 열렬한 믿음을 져 버린, 내 아들.
<노랑은 용기와 의지를>
사리암은 영웅이 되기 싫었다. 룩스 해방에는 별로 관심도 없었고 다른 사람들이 불행하게 사는 것은 유감이지만 대책도 없이 구해서 뭐가 달라지겠냐는, 그의 성격으로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의 부정적인 태도를 내비쳤다. 그는 악어의 꿈을 꾸는 그 긴 시간 동안 자신의 부모가 오른손이거나, 적어도 방관자일 것이라는 짐작을 했다. 그것은 의심이라고 말하기도 우스운 수준의 직감이었다. 아만과 타타니르는 늘 거침없는 사람들이었고, 만일 그들이 왼손이었다면 기도원으로 보내기 전 어떻게든 사리암에게 ‘너는 잡아먹힐 거야.’라고 말 해 줬을 것이 분명했다. 꼭 기도원에 가기 전이 아니라도 그들에게 기회는 있었다. 기도원 내부 공사를 핑계로 몇 번이고 사리암은 전원에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단달의 실종에 대해서 타타니르와 아만이 다른 말을 하지만 않았어도 사리암은 혹시 왼손일지도 모르지 않아? 라는 희망을 품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지난 이야기였다. 사리암은 단순하긴 했지만 바보가 아니었고, 지나치게 긍정적인 만큼 체념이 빠른 편이었다. 그는 자신의 부모가, 그리고 자신의 전원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고 누구의 편에 서 있든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랐다. 비록 룩스인 자신을 희생시켜 유지시키려던 행복일지라도 그것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어떤 오래된 비극처럼 사리암은 아만의 가슴에 칼을 꽂는다. 패륜! 애써 괜찮은 얼굴을 하고 이것은 합리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체념은 빠르게 이루어진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죽어가는 아만에게 저도 사랑해요, 라고 말한다. 모든 것이 쉽다. 사리암은 이 일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죽이지 않았더라면 아만은 고집을 꺾지 않았을 것이고, 파쿠트 노예가 되거나 남에게 사살 당할 바엔 자신의 손에 죽는 게 나았을 것이라고 사리암은 생각했다. 아만은 어린 사리암의 머리를 노란색 실로 땋아주며 말했다. ‘노랑은 용기와 의지를.’ 노랑은, 용기와 의지를. 당신을 죽이고도 울지 않을 용기와, 포기하지 않을 의지를. 사리암은 그냥 웃는 수밖에 없었다. 아만 때문에 무너지기엔 아만이 그를 너무 강하게 키웠기 때문이었다.
<상실>
거스투스를 죽이고 배에 오르자 사리암은 그제야 실감했다. 아만을 죽였다. 생각보다 상실감은 크지 않았다. 10살 이후로 사리암은 거의 혼자 자라온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성인기의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유년기를 잊어가고 있었으므로 가슴이 무너진 것처럼 아프거나 참을 수 없는 자괴감에 치를 떠는 일은 없었다. 그간 동물을 죽이거나 아니무스를 사냥했을 때보다 검으로 끝을 맺은 마지막은 그에게 깊은 체감을 주지도 못 했다. 어머니 대지로 돌아가라. 혼자 선실에 틀어박혀 사리암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쉽게 웃을 수 있었다. 그래서 눈물이 났다. 왜? 왜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사리암은 사냥꾼이 된 이래로 평생 자신이 어떤 죽음에 슬프지 않을 것을 두려워했다. 견딜 수 있을만큼의 상실감은 그를 두렵게 만들었다. 체념으로 뒤덮인 유년기와 룩스로 태어나게 된 운명을 그는 쉽게 받아들였고 아만의 태도 역시 그에게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죽을 만큼 아프길 바란 것은 아니었으나 가슴이 미어지고 심장이 욱신거릴 만큼은 아프길 바랐다. 부모중 하나를 죽였으니 그 정도의 죄책감이 목을 조여 오길 그는 기도했다. 이래서는 안 된다. 아프지 않은 채 이번 죽음마저 체념하고 넘길 수 있다면 나는 도대체 무엇이 된단 말인가? 죽음에 왜 이렇게 무뎌진단 말인가? 내가 불멸이기 때문에? 사리암은 자신이 가진 불멸을 이해하지 못 했다. 자신의 불멸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나누어줄 수 있었더라면 세상은 이만큼 최악이진 않았을 것이다. 특정 몇 명만 돌연변이로 태어나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누군가 세상을 비극으로 이끌기 위해 안배해 놓은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것을 안배한 자는 누구란 말인가? 아니무스나 파쿠트, 룩스도 다 그 안배자에 의해 놀아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리암은 애써 얼굴을 찡그렸다. 표정을 일그러트리자 그나마 괴로운 감각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분노는 명확했으나 슬픔은 희미했다. 파쿠트의 눈은 사리암이 가진 사냥꾼의 재능을 알아보았다. 그는 건강한 몸을 가졌고 생명의 존엄성을 해치는 죄책감을 누구보다 빠르게 극복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상실감과 죄책감에 집착했다. 자신이 가져야만 하는 어떤 윤리적 감각들을 잃지 않기 위해 강박적으로 매달렸다. 당신이 어떤 사람이어도 당신을 사랑해. 그러니까 내가 이런 사람이어도 날 사랑해 줄 거지? 이렇게 노력해야만 살인에 울 수 있는 사람이어도 날 사랑해 줄 거지? 악어는 그의 꿈에서 자취를 감췄고 사리암은 이제 늪에 빠져도 혼자 힘으로 걸어 나올 수 있었다. 그 누구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는 만들어진 상실감 속에서 자신의 사람다움을 지키기 위해 버텼다. 괜찮아. 뭐가 괜찮은지도 모르면서 그는 계속해서 괜찮다고 말했다. 신을 열렬히 믿으며 구원 받을 것을 꿈꾸던 어머니와 어떤 윤리적 관념에 목을 매는 아들은 필연적으로 닮은 얼굴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괜찮다고 말하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는 비극의 세계에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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