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ARIAM
  • 2019. 9. 22. 19:44


  • 1

     

    영웅들

     

    항상 정직과 신뢰를 잃지 말아라. 타타니르는 그렇게 말하며 사리암의 머리카락을 땋아주었다. 푸른색은 정직함과 신뢰를 의미하고, 노란색은 용기와 의지를, 그리고 보라색은 고결함과 영원의 맹세를. 뜻을 가진 색실들이 그의 머리를 장식할 때마다 사리암은 자신이 이 색들의 의미를 바래지 않게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리암은 믿음을 잃지 않기 위해 끝없이 노력했다. 아만이나 타타니르가, 전원의 어른들이 자신을 평생 속여 왔다고 해도 용서할 수 있었다. 평생의 신앙이 기도원에서의 몇 년으로 다 뒤집혀 버려도 이해해 보려고 했다. 상급생들을 떠나보내는 것이 마음은 아팠지만 자신이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아무리 키와 덩치가 크고 마음이 굳어도 그는 고작 열 네 살의 소년일 뿐이라 가끔 숨이 턱턱 막혔다. 늪에 빠져 가라앉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 순간부터 사리암의 꿈에 찾아왔던 악어는 그 세로로 긴 동공과 함께 자취를 감춰버렸다. 이제는 스스로 이 늪을 헤엄쳐 나가도록 해. 늪지 속에 점점 가라앉고 있었지만 그에게 있어 그건 악몽이 아니었다. 폐에 차오르는 진흙을 뱉어내며 겨우 겨우 바깥으로 기어 나왔을 때, 사리암은 자신이 얼마나 편하게 살아왔는지 마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사리암. 괜한 투정 부리지 말아라. 언제나 정직하고 신뢰를 잃지 않아야 하고, 너는 용기와 의지와……

     

    네가 잃지 말아야 할 수많은 것들을 잊지 마.

     

    아만과 타타니르는 사랑으로 사리암을 보살폈다. 그들이 어떤 의도로 사리암을 기도원에 보냈든 간에 10년이라는 시간동안 자신의 아이를 한순간이라도 사랑하지 않았을 부모는 없었을 테니까. 아만은 사리암에게 엄격한 편이었지만 타타니르는 언제나 사리암을 싸고 돌았다. 언젠가 너도 어른이 되면, 이라는 말을 할 때 타타니르의 얼굴은 빛을 등지고 있어 희미하게 점멸했다 밝아지는 것을 반복했다. 사리암은 타타니르의 젊은 얼굴을 대신하여 그 점등의 순간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네가 잃지 말아야 할 수많은 것들을 잊지 마. 타타니르는 사리암에게 영웅적 자질들에 대해 늘어놓곤 했다. 정직함과 신뢰, 용기와 의지, 남을 수호하는 애틋한 마음들. 그리고는 제 아이의 머리를 그런 의미들을 가진 실을 가져다 수없이 땋아주는 것이다. 우린 널 사랑한다, 우린 널 사랑해! 그러니까 우리에게 정직하고, 우리를 믿고,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용기와 의지를 잃지 마. 그 다음 모두를, 모두를 수호하는 애틋한 마음을. 사리암은 타타니르에게 웃어주었다. 나도 사랑해, 타타니르. 정말 사랑해, 아만. 언젠가 어른이 되면 꼭 다시 찾아올게. 그 때까지 아무 일 없이, 건강하게, 내게 말해준 모든 잃으면 안 될 것들을 지키면서 살아줘야 해. 날 기다려 줄 거지? 어떤 마음이어도 날 사랑해줄 거지? 나 사실 고백할 게 있어. 우리 기도원 휴게실에 보드 게임이 하나 생겼는데, 그거 이름이 <영웅들>이거든. 그런데 나는 전혀 영웅이 아니야. 영웅이 되고 싶지 않아. 나는 이제 누굴 믿기 힘들고, 용기를 내려면 최선을 다 해야 하고, 그리고 고결한 마음은커녕 누굴 지키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아. 그래도 날 생각해 줄 거지. 그럴 거지.

     

    악어는 더 이상 사리암의 꿈에 나오지 않았다.

    어떤 말도 듣기 싫어진 모양이었다.

     

    2

     

    값비싼 동정

     

    전원에서 가장 인기 있던 단달이 실종 되었을 때 사리암은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가족들은 사리암의 성장통을 눈치 채지 못했던 것처럼 사리암의 상실감도 눈치 채지 못했다. 사람은 생각보다 자기 자신 이외의 타인을 둘러보기엔 식견이 좁기 때문에, 사리암은 전원에서 어떤 의심도 받지 않고 평소처럼 행동할 수 있었다. 편지 공장에 방문하기 전까지는 파쿠트가 어떻게 살아남는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사리암은 오히려 마더나 전원 사람들을 동정했다. 이것은 값비싼 동정이었다. 누가 누구를 동정한다는 거야? 라고 누군가 비웃으며 말해도 그러게, 라고 멋쩍게 대답할 수밖에 없는 감정적인 부분. 사리암은 자신의 이런 감정적인 부분이 언젠가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의 발목을 잡게 될 것이라는 걸 직감했다. 그는 극복이 빠르고 대체로 무던했지만 불쾌함을 숨길 줄 몰랐고 때때로 지나치게 냉정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너 정말 괜찮은 거 맞아? 하고 몇 번이나 동년배들에게 질문을 받고 나서야 사리암은 애석한 기분이 들었다. 괜찮지 않으면? 그럼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기도원은 아이들이 지내기에 나쁜 환경은 아니었다. 부분적으로 자급자족을 해야 하는 것은 틀림없었으나 잘 곳이 있고 원한다면 간식을 먹거나 독서를 하는 일도 무리 없이 가능했다. 사리암은 부족하지 않게 자랐다. 먹고 싶은 건 먹었고 필요한 건 받았다. 가끔 누군가 그를 위해 자잘한 장난감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러므로, 그는 괜찮아야 하는 것이다. 도대체가 부족한 것이 없는데 여기서 마음 아파하는 것은 정상인가? 사리암은 강한 사람들 아래에서 굳건한 마음을 다지며 자랐다. 그는 깊이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거나 자신의 몸을 태워 사람들을 살리는 룩스에 대해 이해하기엔 강인한 마음으로 굳어버린 것이다. 사리암은 생각하는 것을 멈췄다. 다 의미 없는 짓들. 쓸데없는 동정심. 자신이 그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한들 어쩔 것인가? 그들은 거기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닐 테였고 밖으로 나온다고 하더라도 살 방법을 처음부터 다시 익히고 구해야 했다. 그러니 그가 그 날 저녁 불쾌감에 베개 커버를 뜯어 놓은 일들은 값비싼 동정의 대가라고 명명해야만 한다.

     

    3

     

    사리암

     

    소나무의 기둥을 베는 것은 도구만 있다면 갈대의 줄기를 베는 것보다 쉽다. 강한 힘으로 몇 번 정도 두들기면 소나무는 쉽게 꺾여 쓰러진다. 강한 것은 강한 힘에 굴복한다. 사람들은 굳건하고 강인하기를 소망하지만 결과적으로 완벽한 힘이라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흘려보낼 줄 모르는 채 자리를 지키기만 하는 것은 쇠퇴하기 마련이다.

     

    아만은 네 개의 줄이 교차하여 사각형의 모양 되는 직물 무늬를 짜는 것에 소질이 있었다. 그녀는 사리암만큼 덩치가 컸고 손가락도 두꺼웠지만 재봉틀이나 물레를 돌릴 때만큼은 누구보다 섬세했다. 물레를 돌리는 일도 마찬가지로, 잡념이 길어지게 되면 실이 고르지 못하고 엉키게 되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거야. 그러니 흘려 보낼 때는 깊은 고민을 하지 말아라. 소나무처럼 우직하되 갈대처럼 지나쳐라. 아만은 기본적인 것들을 사리암에게 가르쳐 줄 때면 그런 말을 하곤 했다. 어린 사리암은 당연히 그 말들이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아만은 그런 아이를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그거 내가 꼭 알아야 하는 거야? 사리암이 반문하면 아만은 잠시 입을 우물거리다가 곧 아니, 라고 고개를 저었다. 아만이 바느질하는 것을 하루 종일 지켜보던 날 사리암은 아만에게 물었다. 내가 만약에, 아만이 말한 대로의 사람이 될 수 없어도 아만은 날 사랑해 줄 거야? 아만은 천 위로 네 개의 줄을 교차하여 사각형을 만들었다. 사리암. 내 아들, 사랑하는 나의. 천에 새겨진 사각형은 딱딱했고, 틀림이 없었으며 흘려보낼 공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름다웠다. 그렇기 때문에 무늬가 되었고 가치를 가졌다. 사리암은 아만을 안아주었다. 나도 사랑해, 엄마. 나도 정말로 사랑해. 그러니까 나를,

     

    나를 사랑해줘.

     

    이것은 모두 거짓과 불신, 그리고 값비싼 동정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체념하기를 선택했다. 그러면 잠깐은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누굴 구하기엔 그의 처지가 좋지 못했고 그는 도저히 영웅이 되고 싶은 마음이라곤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쇠퇴하기 위해 굳건하게 서는 것뿐이다. 나를 사랑해줘, 나도 사랑할게, 헛된 말을 하며 믿음을 기대하는 일 뿐이다. 그것이 모두 사리암, 사람의 일인 걸 어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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