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한 검정>
노인은 오랫동안 죽음의 순간을 기다렸다. 추석 연휴가 지난 지 고작 일주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자식들은 노인을 찾지 않았다. 공과금이 무서워 틀지 않은 에어컨 때문에 노인은 여름 내내 땀을 흘렸고, 제대로 씻지 못하는 불편한 몸은 금세 많은 염증을 얻었다. 마지막 도리를 하기 위해 첫째 아들이 늦은 밤 전화를 걸어 왔을 때 노인은 아들에게 괜찮다고 말했다. 다 괜찮으니 걱정 말아라. 추석은 잘 보냈지? 그게 노인이 생전에 남긴 마지막 말이 될 줄은 본인도 몰랐을 것이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죽음의 순간이 노인을 방문했을 때 노인은 저승사자인 이도현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다른 자식들에게도 전화 한 번만 하고 가겠다는 그 별 것 아닌 원한. 저승사자의 입맞춤에 노인은 울며 매달리던 것이 언제였냐는 듯이 곧 조용해졌다. 죽음은 고요한 검정과 같았다. 이도현은 쓰게 느껴지는 입 안을 뒤로 한 채 회사로 복귀했다. 몇 번을 반복해 이도현에게 익숙해진 일임에도 항상 좋은 마음으로 끝을 내기는 어려웠다. 머리카락이 완전한 검정으로 물들기 직전이었다. 이도현은 회사의 옥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동료들은 그에 대해 말할 때 융통성이 없다거나 오지랖이 넓다, 라고 표현하는 식으로 그의 일처리 방식을 깎아내렸다. 저승사자라고 해서 이도현처럼 많은 부담을 혼자서 질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그 자신도 이런 사실들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안다고 멈출 수 있었더라면 불온한 검정이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맥박 칠 일이 있었겠는가. 옥상의 철문이 엇나가는 소리를 내며 무겁게 열렸다. 이도현은 타락하지 않기 위해서 눈물을 흘려야 했다. 완전한 검은색으로 물들기 전에 흘리는 그의 검은 눈물은 꼭 속죄하는 신자나 성모 마리아 조각상이 흘리는 것처럼 성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별 것 아닌 존재의 성스러움이란, 언제나 신의 눈에 띄는 결말을 맞는 것이다.
헤르메스는 이도현에게 꽤 관심이 많았다. 이도현 본인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할 테지만, 그에게는 시선을 끄는 어떤 위태로움이 있었다. 굳이 저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괜찮을 텐데, 라고 생각하며 그 마르고 지친 등을 바라보게 만드는 힘. 이도현의 물건을 허락도 없이 가져가거나 어디까지 참나 자꾸만 찔러 보게 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기껏 걱정 돼서 왔더니. 이도현의 머리카락 한 올도 찾을 수 없었던 사무실 내부를 떠올리며 헤르메스는 복도 한 켠에 서서 상대가 어디에 있을지 잠깐 생각해 보았다. 긴 생각을 거치기도 전에 답은 간단하게 떠올랐다. 애초에 이도현은 활동 범위가 넓은 편이 아니었고, 헤르메스는 이런 것을 추측하는 데에 꽤 일가견이 있었다.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에 발을 내딛으며 헤르메스는 조용한 음률을 입 안으로 흥얼거렸다. 어찌 되었거나 신에게 약하고 성스러운 인간이란 그 대상이 얼마나 질색하든지 관계없이 즐거움을 주는 존재인 것이다.
<피학적 붉음>
옥상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을 때 이도현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골치 아픈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그것은 그가 저승사자로서 가지고 있는 감각적 특성이라기보다는 한 존재에 대한 일종의 경계심이 레이더처럼 작용한 것에 가까웠다. 옥상의 철문을 충분히 소리 없이 열 수 있으면서도 굳이 존재를 알려주는 것처럼 입장하는 꼴이 이도현의 입장에서는 전혀 기껍지 않았다. 검은 손수건에 얼굴을 묻고 이도현이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시는 동안 헤르메스는 군더더기 없는 걸음걸이로 금방 이도현의 곁에 도달했다. 잘 지냈나요? 우리 꽤 오랜만인 것 같은데. 오랜만이라고 해 봤자 마지막으로 본 지 일주일이 조금 안 됐을 뿐이었다. 이도현은 오랜만이라는 상대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눈물을 닦아낸 얼굴을 들어 헤르메스를 바라보았다. 신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가? 흰 가면은 무기질적인 미소로 이도현을 마주보았다. 울었나 봐요. 헤르메스가 입을 열었을 때 이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잠깐 이어진 침묵 속에서 헤르메스가 흰 장갑을 낀 손을 이도현의 얼굴을 향해 뻗었다. 이도현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뻗어오는 흰 손길은 검은 얼룩이 쉽게 묻어날 것이 분명했다. 검은 눈물에 헤르메스는 분명 흥미를 가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도현은 지금보다 자신이 귀찮아질 미래를 확신할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신경이 과민 되었기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지금까지 쌓아온 피로가 한 번에 누적되어 터진 것인지는 몰라도 급격하게 밀려오는 피로감에 이도현은 바닥으로 고개를 숙였다. 접촉도 한 번 없었건만 콧대의 윗부분이 아파왔다. 자연스럽게 잔기침이 터져 나왔다. 헤르메스는 지치고 피곤해 보이는 이도현의 그런 행태에 도움을 줄 생각이라고는 전혀 없는 모양으로 놀릴 건수라도 잡은 악동처럼 가면 너머로 눈을 빛내고 있었다. 이도현이 고개를 숙인 바닥 위로 툭 하고 검은 핏방울이 떨어졌다.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 피가 흐르는 것을 급히 막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불온한 마음을 일으키는 검정. 옥상 바닥이 수채화 물감을 한 방울 씩 떨어트리기라도 한 것처럼 검은 자국들이 남았다. 이도현의 손은 바닥보다 상태가 심각했는데, 희고 가는 손가락 사이사이로 흐르는 검은 피는 보는 상대로 하여금 이질적인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헤르메스는 눈에 띄게 당황해 얼굴을 가리지 않은 손으로 급하게 제 손수건을 찾아 꺼내는 이도현을 관람객처럼 지켜보고 있었다. 말 그대로의 관람은 짧게 끝났다. 헤르메스는 이도현이 완전히 피를 닦아내기 전에 흰 장갑을 낀 오른손을 상대의 얼굴을 향해 휘둘렀다. 헤르메스가 골치 아프다고 생각하긴 했어도 당장 폭력을 행사할 거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한 이도현의 고개가 주먹질에 속절없이 다른 방향으로 돌아갔다. 아, 하는 단말마의 탄성이 둘 사이의 침묵을 깨트렸다. 뭐하는, 짓, 인가요? 겨우 겨우 멎어가던 피는 한순간에 가해진 충격에 언제 멈출 기미를 보였냐는 듯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신기해서요. 검은 피라니, 신기하잖아요? 신다운 순수한 물음과 함께 헤르메스는 웃고 있었다. 정말 유희거리로 고통을 안겨준 것일 뿐이라는 뻔뻔한 태도에 이도현은 머리에 열이 올랐다. 저 사람, 정확히 말하자면 신이니 사람은 아니지만, 저 존재와 엮이면 도대체 평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눈물을 흘린 탓에 지친 몸으로 피로가 쌓여 코피까지 터진 상태가 되었지만 이도현은 순순히 저를 괴롭히는 신에게 굴복해 줄 마음이 들지 않았다. 검은 피를 다 닦아내지 못한 손이 헤르메스의 흰 가면을 향해 순식간에 다가왔다. 신은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므로, 헤르메스는 이도현과 달리 조금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이도현은 그 작은 사실조차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맞은 얼굴이 욱신거리며 아파 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리는 줄도 모르는 채로 이도현은 성큼 헤르메스와 거리를 좁혀 섰다. 물러서지 않는 상대란 거리를 좁히기 최적의 상대라는 뜻이기도 했다. 욕이라도 퍼부어주고 싶었지만 저승의 계율이란 보수적이기 짝이 없어서, 이도현은 혓바늘이 돋아난 혀로 입 안을 축이며 헤르메스의 가면을 벗겨내었다. 손에 남은 검은 피가 가면의 결을 거슬러 옥상 바닥에 남긴 것과 마찬가지로 희미한 자국이 되었다. 가면 없이 마주한 신의 얼굴은 너무나 인간적이라, 이도현은 잠시 헛웃음을 삼켰다. 불온한 검은 피, 라는 말이 헤르메스의 입에서 나와 문장이 되기 전에 이도현은 헤르메스의 가면을 더럽힌 것도 모자라 흰 옷깃을 양손으로 잡아 끌어당겼다. 생각보다 쉽게 몸을 숙여주지 않는 헤르메스의 멱살을 온 힘을 다해 잡아당긴 이도현의 손등에 설핏 푸른 핏줄이 섰다. 간신히 서로의 눈높이가 비등하게 맞춰진 순간 이도현은 이를 세워 헤르메스의 입술에 제 입술을 부딪쳤다. 불온한 검정이 만들어낸 폭력적인 붉음이 둘 사이의 자그마한 공간을 타고 흘렀다가, 채워졌다. 신의 피는 와인의 맛이 아니었다. 어쩌면 이도현의 검은 피가 반쯤 섞여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헤르메스는 저돌적으로 나오는 상대에게 꽤 놀란 모양으로, 그 라임색의 시선이 도르르 굴러 이도현의 얼굴에 정박한 것처럼 떨어졌다. 아. 이것은 키스인가? 무언가의 결론이 내려지기도 전에 이도현은 금세 헤르메스에게서 떨어졌다. 한 번 물었다 놓기라도 한 것인지 헤르메스의 입술이 찢어져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상사에게 방금 해를 끼친 사람이라고는 짐작도 할 수 없는 의기양양한 태도였다. 어이없어 하는 헤르메스를 앞에 두고 이도현은 꼭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장군처럼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인간이랑 다를 바가 없으시네요. 죽은 사람이 저승사자의 키스를 받는 건 아실 테고. 헤르메스는 검은 피가 묻은 제 흰 장갑으로 제 입술에서 흐르는 붉은 피를 닦아냈다. 그리고는 곧 장갑을 벗어 버렸다. 아, 그래서 그것은 키스였구나. 헤르메스는 이 당돌하고 피곤에 지쳐 평소와 달리 당돌해진 저승사자 나부랭이를 어찌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며 수채화처럼 바닥에 번진 검은 핏방울들을 구두의 뒤축으로 짓이겨 밟았다.
<미학과 색채 이론을 통한 폭력적 해석>
색채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야기가 길어진다. 그러니까, 한 때 분홍색은 용기의 색이었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분홍이란 남성성을 상징하는 색으로 대표되었으나, 곧 장난감과 의류 산업에서 분홍색을 귀엽고 여성스러운, 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마케팅하기 시작하자 색의 상징은 손바닥을 뒤집듯이 쉽게 변모하였다. 사람들은 푸른색이 정신과 마음의 안정을 불러일으키는 색이라고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피카소의 그림들을 관람하며 그것이야말로 우울함의 색이라고 평가한다. 미학과 색채 이론을 통한 색의 해석은 대체로 가변적이다. 대중의 가치관이란 결국 개인이 어떻게 느끼는가를 중점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체와 시장의 광고와 속임수를 통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사무실까지 헤르메스에게 어깨를 잡혀 끌려오면서 이도현은 생각을 비우기 위해 애를 썼다. 막상 저질렀을 때는 통쾌하기 짝이 없어 조금은 당황한 것 같은 제 상사에게 드문 미소까지 보여줬으나, 돌이켜보니 저승사자로서의 규율을 지키고자 욕만 안 했을 뿐 상해는 끼친 것이라 일을 막 끝내고 귀환할 때처럼 입이 썼다. 인간이 아닌 신에게는 저승사자의 입맞춤 같은 것은 도통 듣지 않아서, 헤르메스는 보복이라도 할 것처럼 별 말 없이 옥상에서부터 이도현의 어깨를 잡아 뒤에서 그를 밀어대며 사무실로 끌고 가는 중이었다. 이도현은 자존심을 굽히고 상처를 낸 건 죄송하지만 역시 그 쪽이 먼저 폭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로 말을 시작할지 아니면 그냥 될 대로 돼라의 마음으로 먼저 치셨는데 사과를 제가 해야 합니까? 하는 질문으로 운을 떼야 하는지 망설였다. 그러나 이도현이 답을 정하는 것보다 사무실에 발을 들이게 되는 순간이 더 빠르게 찾아왔고, 사무실 문이 닫히고 잠기자마자 속절없는 폭력이 이도현에게 무슨 생각을 하냐는 듯 빠르게 그를 덮쳐왔다. 헤르메스가 이를 세워 이도현의 목을 물어버린 것이다. 검은 피가 신의 잇자국을 따라 송골지게 맺혔다. 이도현이 단말마의 탄성을 외치기도 전에 헤르메스가 장갑을 벗은 손으로 입가를 막아버렸다. 이도현은 꼼짝없이 갇힌 신세가 되었으나 그대로 제 뒤에 선 헤르메스의 발을 콱 밟아 버리는 기지를 발휘하여 구석진 모퉁이에서 고양이를 무는 쥐처럼 그 품을 벗어났다. 저한테 대체 왜 이러십니까? 이도현이 묻자 헤르메스가 딱지가 앉은 제 입술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도현은 갑자기 할 말을 잃었다. 본인이 먼저 검은 피가 신기하다며 코피 나는 사람의 얼굴을 친 것은 고려하지 않는 모양새에 기가 찼던 것이다. 이번에는 안 웃나요? 헤르메스가 아까까지의 일이 거짓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멀끔한 행세를 하며 이도현을 향해 이죽거렸다. 명백히 예의를 차린 어투임에도 이도현은 빈정이 상했다. 이도현이 다시 한 번 손을 뻗어 헤르메스의 멱살을 잡아 쥐었을 때, 붉은 피를 흘리는 신은 인간을 향해 웃어주었다.
검은색과 붉은색은 다른 색들과 달리 많은 문화와 시대에서 드물게 비슷한 방식으로 해석 되어왔다. 검정은 고요와 죽음을 상징하고 붉음은 욕정과 경고를 상징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색은 모순적인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검정에게는 경외심이, 그리고 붉음에는 사랑의 의미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다채로운 방법으로 미학적 해석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문학작품에서 인간의 피를 검붉은 색으로 묘사한다는 것이 그 해석 방법들 중 하나의 예시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색채 이론은 다양한 관점을 통해 접근할 수 있으며,
검붉음에 대한 하나의 폭력적 해석으로 이 이야기에 대한 결론을 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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