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원유진] 고등학교 AU
  • 2019. 7. 16. 04:59


  • ※ 지인 회지 축전용 글

    ※ 고등학교 AU


    선생님.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송태원은 고개를 들었다. 교무실의 좁은 개인용 책상에서 거의 몸을 구겨놓고 앉아 있었던 터라 고개만 살짝 들었음에도 책상 다리가 한 번 덜컹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한 손으로 책상을 잡아 누르며 송태원은 저를 부른 목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이리저리 시선을 돌렸다. 한유진이 송태원을 한 번 더 불렀다. 선생님. 송태원은 한유진이 자신을 선생님이라고 부를 때마다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의 학생은 10대 같지 않게 성숙한 면모를 가지고 있었고 유독 다른 선생들보다 그를 따랐다. 송태원은 한유진의 담임선생님이 아니었다. 질문할 게 있는데요, 하고 말하며 제 옆으로 다가오는 한유진에게서 송태원은 무심코 몸을 뒤로 빼 멀어졌다. 수업 관련입니까? 송태원이 묻자 한유진이 웃었다. 체육은 필기시험 안 보잖아요. 송태원은 눈썹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책상 다리가 다시 덜컹하고 흔들렸다. 무심코 송태원이 발끝으로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한유진이 간이 의자를 끌고 와서는 송태원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선생님, 저 좋아하세요? 조용한 교무실 안에서 한유진은 작은 목소리로 송태원에게 물었다. 송태원은 그 말에 다시 제 옆에 앉은 한유진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부정도 긍정도 쉽게 뱉지 않았다. 한유진은 재밌는 걸 발견한 악동처럼 계속 웃고 있었다. 저 좋아하시는구나.

     

    송태원이 한유진을 발견한 것은 작년 여름이었다. 남자 고등학교의 체육 시간이란 대체로 정해진 커리큘럼이라는 것도 없이 축구공과 농구공 중 하나에 다같이 달려들어 구르기 바빴으므로 송태원은 그저 그 날도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학생들을 감시자의 눈으로 지켜봤을 뿐이었다. 한유진은 등나무 그늘에 앉아 달리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송태원은 한유진에게 어디가 아픈 거냐고 교사의 의례를 갖춰 물었고 한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누군가에게 빌린 체육복인지 사이즈가 안 맞는 체육복 상의 아래로 한유진이 받쳐 입은 검은 반팔 티가 흘긋 보였다. 날이 너무 더워서요. 뛰기 싫어요. 송태원은 한유진의 말에 수행평가 점수에 반영됩니다, 하고 딱딱하게 대꾸했을 뿐이었다. 한유진이 제 옆을 손으로 툭툭 두드리며 수행평가 점수는 중요하지 않으니 제 옆에 앉아달라고 말했으나 송태원은 다시 시선을 운동장 쪽으로 돌릴 뿐이었다. 원래 그렇게 무뚝뚝하세요? 한유진이 물었다. 송태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방학이 지나고 두 번째 학기가 시작했을 무렵이 되자 한유진은 등나무 그늘에 앉아있는 대신 다른 학생들과 같이 축구공을 차는 것을 선택했다. 송태원은 운동장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한유진을 지켜보았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한유진은 그다지 좋은 공격수는 아니었으나 다른 학생들이 골을 넣을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에 꽤 능숙한 편이었다. 학생들 중 하나가 큰 소리로 지는 쪽이 아이스크림 사기, 하고 외쳤고 와르르 웃는 소리와 작은 욕설 같은 것들이 그 말의 뒤를 따랐다. 날은 슬슬 선선해지고 있었지만 아이들은 땀에 절어 아무렇지 않게 체육복 상의를 벗어 던졌다. 송태원은 땀을 뚝뚝 흘리며 체육복을 벗어던진 검은 반팔 차림의 한유진이 캔디바 같은 아이스크림을 물고 저를 향해 손을 흔드는 것까지 지켜보았다. 저희가 이겼어요. 송태원은 한유진이 많은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을 보았다. 한유진은 무리에서 동 떨어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한유진은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융화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송태원이 보는 한유진은 그랬다. 송태원은 제게 손을 흔드는 한유진을 무시하고 다음 수업 준비를 핑계로 교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송태원이 생각하기에 한유진은 자신과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이었다. 송태원은 한유진의 땀에 젖은 검은 머리나 검은 반팔 아래로 드러난 흰 팔꿈치 같은 것을 생각했다. 송태원은 스스로가 끔찍해졌다. 이것은 질투나 거리감보다는 욕정에 가까운 일이었다.

     

    다음 체육 시간에 한유진은 공을 차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송태원은 늘 학생들을 감시하기 위해 서 있던 자리를 이탈해서 넘어진 한유진에게 다가갔고, 한유진은 괜찮냐며 자신을 일으켜 세워주는 친구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다. 양호실에 가야하지 않겠냐는 아이들에게 등을 떠밀려 한유진은 곤란한 얼굴과 깨진 무릎으로 송태원에게 말했다. 양호실에 다녀와도 될까요? 송태원은 그러세요, 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유진 없이도 축구 경기는 내기를 건 채 계속 진행 되었다. 수업을 마치는 종소리가 울릴 때까지 한유진은 돌아오지 않았다. 한 팀이 졌고, 이긴 팀은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이제 계절은 여름의 기운을 잃은 지 오래였음에도 아이들은 쉽게 열기를 잃지 않았다. 송태원은 한유진 없이도 잘만 이어지고 반복되는 장면들을 눈에 담았다. 교무실로 돌아가기 전 양호실을 들려 한유진이 여전히 그곳에 있나 확인했지만 양호실에는 갑작스러운 체육 교사의 방문에 당황한 양호 선생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송태원은 보건 기록부에 적힌 한유진의 꽤 단정한 글씨와 서명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선생님, 저 좋아하시죠.

     

    송태원은 당돌하게 물어오는 한유진의 말을 단번에 부정할 수가 없었다. 수업 시간이 한창인 때라 교무실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누군가 듣게 된다면 송태원과 한유진 둘 모두에게 곤란한 문장이었다. 송태원은 간신히 입을 열어 대꾸했다. 평소 같은 목소리였다. 질문은 그것뿐입니까? 한유진은 예나 아니오로 대답하는 대신 송태원의 검은 눈을 응시했다. 송태원은 한유진의 무릎으로 시선을 내렸다. 체육복이 아닌 교복 바지를 입고 있어 전에 깨진 무릎이 다 나았는지 아닌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송태원이 말했다. 교실로 돌아가세요. 수업 시간입니다. 송태원의 일관적인 태도에도 한유진은 민망해하는 일 한 번 없이 이렇게 말했다. 저한테 끌리시는 거 알아요. 송태원은 부정하지 않았다. 한유진에 대한 어떤 기묘한 감정들을 억누르는 일은 송태원에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교사로서의 삶과 지금의 반복되는 별 것 아닌 일상에 만족하고 있었다. 자신의 자리가 사라져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사람들의 주변에 둘러싸여 있는 일. 교실로 돌아가세요. 송태원은 한유진에게 경고하듯이 말했다. 일종의 최후 통보였다. 한유진은 치, 하고 몸을 일으키곤 간이 의자를 발로 밀어 치웠다. 전 선생님 좋아해요. 송태원은 다시, 무심코 책상 다리를 발끝으로 차 버렸다. 숨길 거면 그렇게 쳐다보지나 마세요.

     

    학기가 다시 바뀌었다. 한유진은 학년이 올랐고 학년마다 담당하는 체육 교사가 다르기 때문에 체육 시간이 와도 송태원은 다시 한유진을 볼 수 없었다. 한유진은 아주 가끔만 공적인 문제로 교무실에 왔고, 교무실과 거리가 있는 3학년 교실은 송태원에게 말 못할 평화와 상실감을 가져다주었다. 송태원은 묵묵하게 자신의 일상을 이어나갔다. 새로 가르치는 아이들은 송태원을 대부분 어려워했으며, 이전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축구공을 쫓아 운동장을 달리느라 쉽게 체육 선생의 존재를 잊었다. 송태원은 늘 같은 자리에 서서 학생들을 감시했다. 선생님. 누군가 송태원을 뒤에서 불렀다. 등나무 그늘은 햇빛을 따라 운동장 모래 바닥 위까지 긴 그림자를 만들었다. 송태원은 뒤돌아보지 않고도 저를 부른 것이 한유진임을 알고 있었다. 선생님, 저 좋아하시죠. 송태원은 제 옆으로 걸어오는 한유진에게 눈길을 주지 않으려고 애썼다. 수업 시간입니다. 교실로, 까지 송태원이 말했을 때 한유진은 캔디바 하나를 송태원에게 내밀었다. 제가 그렇게 성실한 학생이 아니라서요. 송태원은 한참이나 캔디바를 바라보았다. 다 녹아요, 한유진은 그렇게 말하면서 송태원에게 캔디바를 억지로 쥐어주었다. 매미가 슬슬 울기 시작하는 날씨였다. 한유진은 송태원의 옆에 선 채 공을 차는 후배들을 구경했다. 선생님. 아직도 저 좋아하세요? 송태원이 쥔 캔디바가 녹아 손으로 흐르고 있었다. 한유진이 그 모양을 보다가 아깝게, 하고 중얼거리며 송태원의 손목을 잡아 제 쪽으로 끌고 왔다. 송태원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을 만큼 짧은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한유진의 하복 와이셔츠는 체육복과 마찬가지로 조금 컸고, 그 안에 받쳐 입은 검은 반팔이 흘긋 보였다. 한유진은 크게 입을 벌려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송태원은 그 모든 장면을 올곧게 선 채로 눈에 담았다. 좋아하지 않습니다. 간신히 짜낸 부정의 답에 한유진이 베어 문 아이스크림을 입에 문 채로 웃음을 터트렸다. 캔디바요? 나는 좋아하는데.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송태원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형편없는 거짓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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