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RYDIKE HAECKEL
FOR HVF
무슨 말을 먼저 시작해야 할지 막상 편지를 쓸 수 있게 되니까 잘 모르겠네요. 그러고보면 나는 참 잘 모르겠다는 말을 많이 한 거 같아요. 확신할 수 있는 게 늘 없었거든요. 나는 노럼에서 태어났어요. 얼마 전인 11월 11일이 내 생일이었죠. 생일을 부러 챙기지는 않았어요. 당신들 참 재밌는 사람들이야. 내가 생일이라고 하자마자 자연스레 그럼 축하해줘도 돼요? 하고 물었잖아요.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축하를 받아본 건 이번 해 생일이 처음이었어요. 예수는 죽고서 3일 있다가 부활했다고 했는데 나는 태어난 날부터 3일 있다가 죽는군요. 이쯤 되면 예수는 되지 못해도 준예수는 될 수 있지 않을까, 죽어서도 허황된 생각이나 하고 있어요.
나는 늘 더 배우고 싶었습니다. 나는 늘 머리를 정돈하고 화장을 하고, 향수를 뿌렸어요. 나 자신을 가꾸려고 애를 썼죠.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최후의 발악이었는지도 모르죠. 나는 비백인에 여성이었고 아래로는 다섯 명의 동생이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형제가 셋 밖에 안 남았겠군요. 저도 죽었으니까요.) 부모님에게 트로이가 제 사망 통지를 잘 전해드리기를 바랍니다. 맏딸을 잃었으니 상심이 크실 거예요. 아직 넷째는 열여덟밖에 되지 않았는데 - 롤리타가 무려 18살인데, 왜 같은 18살이라도 이렇게 다른 걸까요? - 아버지 일을 잘 도울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무척 걱정이에요. 괜찮다면 저희 부모님, 잘 돌 봐 주세요.
극단에서 일했던 때가 생각나요. 무대 위에서 배우들은 수십 번 죽었습니다. 나는 죽는 연기를 하는 배우들을 보면서 오늘은 잘했고, 어제는 별로였고, 따위의 감상을 늘어 놓았죠. 나는 배우가 아니라 일개 스탭이었습니다. 스탭이라고 할 수나 있을까요? 정말로 잡일만 했는데 말이에요. 그래도 기죽지는 않았어요. 일은 힘들었고 시급은 다른 백인 남자애들에 비하면 고작 3분의 1 수준이었죠. 생활비를 노럼으로 보내야 했기 때문에 나는 다른 일도 같이 했어요. 매일이 전쟁이었습니다. 빨리 철이 들지 않으면 안 되는 나날들이었죠. 모든 게 불안했지만 나는 무대 뒤에서 배우들이 연기를 하고, 극이 끝을 맺는 걸 보는 게 좋았어요. 그래서 일을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은 저를 아니꼽게 보던 조연출이 저를 대기실로 불렀죠. 나는 울지 않았지만, 그리고 무너지지 않았지만, 사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산산히 무너져 있던 걸지도 몰라요.
그가 내 옷을 찢었습니다. 나는 저항했지만 뺨을 맞았죠. 비명 후에 따르는 체념. 고통밖에 느껴지지 않았던 순간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지? 나는 더러워졌다, 라고 생각했던 수많은 시간들. 참았어요. 견디려고 애썼습니다. 기억의 방에 나는 내 기억들을 전부 묻어두고, 그 방으로부터 도망가려고 했습니다. 기회를 봐서 내가 당한 수치를 이용했고, 내가 당한 차별들을 타인에게 하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어요. 하지만 잘 되지 않았죠. 냉대를 할 수 없어서 더 잔혹하게 눈 앞에서 치워 버릴 방법에 대해서만 생각했습니다. 살아가는 건 끝없는 인내의 연속. 왜 나는 더럽고 왜 나는 추악하고 왜 나는 끔찍한 사람인가. 끝없는 딜레마 속에서 답을 내려준 사람이 있었어요.
그는 내가 연출자로 일했던 극을 보고 극장에 끝까지 남아있었습니다. 나와 이야기 할 수 있겠느냐고 극장에 요청을 넣었더군요. 그는 연구원이었어요. 임상화학 실험을 주로 한다고 했죠. 그는 금발이었고 입이 험했습니다. 대뜸 만나자마자 씨발, 이라고 말하고는 자기 입을 때리더군요. 우스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말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사람. 저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 저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저를 이해하려 들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우리는 아주 좋은 친구가 됐죠. 그 날, 크리스마스에 그가 저한테 청혼했어요. 모든 게 바뀔 수 있는 기회였는지도 모릅니다. 내게 주어진 기회. 나는 승낙했지만, 헤켈이라는 성이 다른 성으로 바뀌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아주 무서웠어요. 그 해의 끝에 나는 그를 봤습니다. 연락이 되지 않아 찾아가 문을 두드렸고 창문을 깼습니다. 깨진 유리창 사이로 보인 것은 금발 머리. 그리고 뜯어먹힌 시체. 부모님이 저를 고향으로 불렀습니다. 제 둘째와 셋째가 죽었다더군요. 어떻게 죽었냐고 물었을 때 어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것들이 내 동생들을 죽였다고 대답했습니다. 나는 내 삶과 내 동생들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내 신념이라고 할만한 것을 잃지 않기 위해서 잘 쏘지 못하면서도 총을 들었습니다. 나는 무서웠어요. 손에 총의 반동으로 인해 상처가 생기는 것도, 점점 피에 무감해지는 것도, 나를 폭력과 멸시로 대했던 사람들과 내가 같아지는 것도 무서웠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증오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내가 사랑했던 것과 내가 가질 수 있었던 것, 내가 누릴 수 있던 모든 것들을 빼앗겼으니까요. 그들은 말합니다. 분노하지 말라, 나의 잘못은 아니다. 나도 원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 의식을 찾은 우리를 학대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도 인간이다. 우리가 최초이자 최후이다.
나는
중도에 서서
오랫동안 그들을
증오해 왔습니다.
To. 트로이
위에 말했던대로 부모님한테 말 좀 잘 전해 주세요. 이미 자식을 셋이나 잃었으니 아마 달래는데 애를 좀 먹을 거예요. 그리고 만약에 이 전쟁이 다 끝나면 부모님 좀 잘 돌봐 주세요. 그나마 마을에서 입지 가지고 있는 당신이니 잘 해줄 거라고 믿을게요. 또 밤에 잠도 자려고 노력해보고 술은 그만 마시고 식사 잘 챙겨야 해요. 알았죠? 당신이 내 남동생이 아니라 연상인 건 정말로 의외야. 제가 더 누나일 것 같지 않나요?
당신을 볼 때마다 그에 대해서 생각했어요. 물론 당신은 금발도 아니거니와 연구원도 아니고 심지어는 그보다 한참 크지만. 어떤 부분에서 비슷하다고 느꼈는 지는 모르겠어요. 물론 내가 당신을 정말 그와 같은 감정으로 좋아한 건 아니에요. 당신은 좋아하기엔 너무 양파잖아요. 듣기로는 취향도 너무 하드 코어 하고요. 그래도 아끼고 있는 건 진심이에요. 그와 닮아서, 가 아니라 당신이 트로이 햅번이기 때문에 당신을 아낍니다. 당신이 살아갈 수 있도록 나는 떠났더라도 계속 당신을 믿을게요. 그러니까 내 믿음에 보답해서 다른 사람들은 이 무대에서 죽지 않도록 잘 지켜주세요. 당신이 옳았다는 걸 내게 알려주세요.
To. 가브리엘라
오늘 아마도 제일 위험 앞에 설 사람이라 걱정이 돼요. 구원에 대해서 얘기했었죠. 나는 사실 신을 믿지 않아요. 종교가 없죠. 그래서 당신의 안전이나 당신을 위해 쉽게 기도해 줄 수 없다는 점이 첫째로 아쉽네요. 물론 누구의 말처럼 신이 있더라면 이런 생지옥을 펼치진 않았을 테지만, 동시에 축복보다는 저주로 존재를 확인시키는 것일지도 모르죠. 가브리엘라, 수태와 형벌의 이름을 가진 천사인 당신에게 영원한 축복이 따르기를 바랍니다. 절대 나 보러 오지 마요. 보낼 거면 올렌이나 보내줘요. 올렌은 인생 2회차인 제 꼬마친구니까, 혹시라도 죄책감은 가지지 말고요. 그 어떤 죽음도 당신 탓은 아니라는 걸 꼭 기억해요. 다치지 말아요, 제일 중요한 건 이거. 당신의 다정함이 내게는 구원이었어요.
To. 노함
노함. 당신은 당신이 사람으로 살기를 포기했다고 말했지만 제 눈엔 누구보다 정 많은 사람이었어요. 내가 알지 못하는 당신의 아픔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는 게 슬퍼요. 좀 더 오랫동안 당신과 눈을 맞추고 우리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나는, 어쩌면 우리는 계속 딜레마에 빠져있었는지도 몰라요. 도덕심을 버리라는 말, 사실 제가 들을 말은 아니었어요. 전에도 얘기 했지만 나는 냉대하기 싫다고 눈 앞에서 치워버릴 생각이나 하는 못 되어먹은 사람인걸요. 오히려 당신이 더 정 많고 도덕심 있는 사람일 거예요. 분노는 윤리 의식이 있는 사람이 훨씬 더 잘 느낀다잖아요.
그러게. 왜 노럼으로 돌아왔을까요? 당신 말대로 어디 북극이나 남극으로 갔더라면 평화로웠을텐데. 그런데 생각해봤어요. 거기는 아무것도 없잖아요. 거기에는 사랑하는 사람도, 가족도, 머무를 집도 없으니까 그들이 노럼으로 돌아왔나봐요. 여전히 이해하고 인정할 수는 없는 부분이지만 그래도 최대한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려 해요. 죽음에 이르러서야 받아들이려는 생각을 하다니, 저도 참 글러 먹었죠. 난 사실 조금 무서워요. 혹시라도 내가 무덤에서 일어나서 누구를 공격하려고 한다면, 그래서 스스로가 결국엔 가장 증오하던 모습의 사람이 되어버린다면 당신이 날 쏴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어요. 물론 그런 일은 없겠죠? 작별 인사를 쓰기가 싫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말해 줄 걸. 자살하겠다는 사람들 잘 말려줘요. 어제 새벽처럼요. 언제나, 당신을 믿어요.
To. 유진
비가 왔던 날을 기억해요? 당신은 비를 맞고 서 있었어요. 나는 당신에게 손수건을 건넸죠. 안녕, 유진. 그러고 보면 대화를 참 못했네요. 그런데도 이상하게 당신하고 약속이 하고 싶었고 당신한테 잘 해주고 싶었어요. 너무 많이 젖어들지 말라고 했죠? 내가 그 말 그대로 돌려줄게요. 너무 젖어 있지 마세요. 슬픔도 비도 다 지나고 나면 괜찮아 질 거예요. 당신은 영민하고 강한 사람이니 굳이 내가 이런 말 하지 않아도 괜찮을 지 모르겠어요. 그냥 떠나는 사람의 오지랖이라고 생각해주세요.
우리 같이 다녔던 날 말예요. 당신이 의지하고 믿어준다는 생각이 들어서 정말 기뻤어요. 다정한 사람. 온전히 당신이 해낸 일들임에도 내게 고생했다고 말해주어 고마워요. 잘 웃지 않아 웃는 모습이 늘 생경하지만, 그래도 나에게 만큼은 무척 좋은 사람이었어요. 자주 웃으라는 말은 일부러 안 할게요. 하지만 웃는 쪽이 더 잘생기기는 한 것 같아요. 안녕, 손수건을 남기고 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이별이 너무 급했군요. 약속을 어긴 건 내가 됐네요. 지키지 못해 미안해요. 아주 먼 후일에 다시 만나요. 당신은 잘 해낼 거예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요.
To. 레셰
더 많은 말을 하고 싶었는데 당신 말 마저 못 대답하고 가서 미안해요. 우리 참 많은 얘기를 했죠? 스누피 얘기를 더 듣고 싶었어요. 애완 동물, 사실 키워 본 적이 없어서 궁금했거든요. 폴란드나 독일에 대해서도 더 들을 수 있었더라면 좋을 텐데. 지나고 나니까 아쉬운 마음만 남네요. 같이 홍차 마실 수 있어서 영광이었어요. 다음에는 내가 컵 케이크라도 사 들고 가야지, 했는데 그게 마지막이었네요. 그럴 줄 알았으면 우리 그 티파티에서 스콘이나 케이크라도 하나 먹을 걸 그랬어요. 시간을 돌릴 수 없어 후회스러운 일만 생각 나네요.
당신 주운 이제 앞으로 좋을 거예요. 내가 내 주운 다 나눠주고 갈게. 트랩이든 1이든 다 괜찮으니까 너무 의기소침해 하지 말아요. 아, 그러고 보니 건축 회사 일에 대해서도 묻고 싶었는데 못 물어 봤구나. 다행일지도 모르겠어요. 내가 오지랖 부리는 거 어쩌면 당신한테 귀찮은 일일지도 모르잖아요. 우리 또 내적으로 잘 통하는 뿌듯함 조니까, 괜히 나보다 훨씬 나이도 많은 당신이 내 남동생 같고 그랬나 봐. 벌써 보고 싶네요. 하지만 당신도 나 만나러 너무 일찍 오지는 말아요. 먼 후일에 다시 만나요. 많이 아껴요.
To. 페어번
역사 얘기 하다가 말았는데, 더 말할 수 없는 게 아쉽네요. 당신 같은 선생님 아래 있었더라면 나는 더 역사를 좋아하게 됐을 거예요.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아주 작았고, 역사는 그렇게 중요한 과목이 아니라며 역사 선생님 조차도 자세히 알려주지는 않았거든요. 나는 매일 일기를 썼어요. 그건 나만의 역사였죠. 오늘도 살아남았다는 기록. 누군가를 잃었다는 기록. 비록 내 끔찍한 몇 가지 기억들을 외면하고 거기서 도망치려 했지만 동시에 누군가는 나를 기억해주기를 바랐나봐요. 그래서 일기를 썼어요. 나는 오늘도 살아남았다고. 하지만 이제는 일기를 쓸 일이 없으니 마지막으로 편지 남길게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래요. 당신들의 기록이 남기를 바라요. 개인인 나는 패배했으나 전체인 당신들은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많이 아껴요. 모든 불운, 내가 떠안고 갈게요. 작별의 말 쓰기가 어렵네요. 잘 지내요. 체슬리.
To. 멜팅튼
오두막에서 힘들게 햄릿 찾아와줬는데 끝까지 읽어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사실 나는 셰익스피어를 좋아하지는 않았어요. 어떤 틀에 박힌 이야기들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이상하죠? 당신에게 들려줄 때는 그 이야기가 좋았어요. 어떤 극 연구가가 그러기를 햄릿이란 인물은 자기가 처한 운명에 어설프게나마 반기를 든 인물이래요. 오이디푸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배역들이 자기 운명에 맞서는 것처럼, 왕자라는 자기 직함을 버리고 제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까지 신념과 운명 사이에서 싸우려던 사람. 물론 이건 저도 들은 얘기일 뿐이에요. 우습지만 나는 햄릿보다는 거기 나오는 조연들을 차라리 더 좋아하거든요.
당신은 거기 나오는 말들이 섬뜩하다고 했었잖아요. 어쩌면 그럴지도 몰라요. 기도할 때 죽이면 천국에 간다. 칼아, 조금만 견뎌라.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숙부를 죽이는 것이 그를 천국으로 보내 답례가 되게 할지도 모른다. 당신의 신념과 분노가 방향성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로멜리. 그리고 당신은 누구보다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당신 말대로 7이 이틀 연속 나왔잖아요. 내 행운을 당신에게도 나누어 줄게요. 그러니 재미없는 극 이야기는 한참 후에, 당신이 아주 오래 나이 먹고 난 뒤에 들으러 오세요. 제 이야기와 무대는 끝났으나 당신의 이야기와 무대는 계속 될 겁니다. 부디 몸 조심 하세요. 언제나 마지막 말을 쓰는 게 가장 어렵네요. 행운을 빕니다, 로멜리.
To. 도미닉
당신이 돌아와서 진짜 다행이에요. 당신이 포로로 잡혀가고 나서 많이 걱정했거든요. 내가 생각한 게 맞을 지 여러 차례 다른 사람들한테 질문 해야 했어요. 난 아주 걱정이 많은 사람이거든요. 입이 막힌 순간부터 내가 죽게 될 거라는 걸 알았지만 사실 하루 정도는 더 견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도움이 더 못 돼서 미안해요. 내가 없어도 당신은 아주 영리한 사람이니까 잘 해낼 거라는 거 알아요. 믿고 있어요. 언제나 곁에 있고 끝까지 지켜볼게요.
당신이 자기를 연구원이라고 소개했을 때, 나 사실 조금 놀랐어요. 연구원인 남자를 하나 알았거든요. 저한테 아주 중요한 사람이었어요. 물론 당신과 그는 닮은 점이 거의 없지만 그래도 순간 깜짝 놀랐어요. 연구원 일에 대해서 더 물어 볼 걸 내가 일했던 것만 잔뜩 이야기하고 왔네요. 남동생 얘기도 더 물어보고 긍정적으로 사는 건 어떤 일인지도 더 물어볼걸. 이제 와서 후회가 많아요. 답을 들을 수 없는 질문들은 뱉지 않을 게요. 그리고 독일어 못한다면서 시구 찾아서 준 건 정말 고마워요. 당신이 없을 때 내가 떠나버려서 작별도 제대로 못했네요. 포로로 안 잡혀가게 조심해요. 의용군 모두가 당신을 많이 의지하고 있는 게 눈에 보이는 걸요. 자꾸 오지랖 부리는 것 같아 미안하네요. 이만 말 줄일게요.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공평하게, 당신은 귀엽고 잘생긴 사람이에요. 알죠? 잘 지내야 해요.
To. 발렌타인
기타 연주도 못 듣게 됐네. 제가 지금 편지 줘도 발렌타인, 당신은 받을 수 있을 지 모르겠어요. 맨날 우리 모인 곳에서 신명나게 욕해주는 사람이 하나 줄어드니까 괜히 섭섭하고 그러네요. 도미닉처럼 금방 돌아올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거기서 취급은 잘 해주고 있는 거죠? 술 너무 받아 먹지는 말아요. 의용군이 지내는 노럼 성에 한 번이라도 피아노가 있는 지 물어볼 걸 그랬네요. 그러면 작별 전에 당신에게 한 곡이라도 어설프게나마 연주해주고 갈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하기는 이제 와서 후회하는 것도 조금 우습죠?
말은 좀 험했지만 저한테 당신은 좋은 사람이었어요. 열심히 싸우고, 최선을 다하고. 이 편지가 당신에게도 무사히 전달 됐으면 좋겠다. 오아시스 노래 좋아한다고 그랬잖아요. 포로로 풀려나면 나 위해서 한 곡만 불러줄래요? 아. 보컬이 아니라 기타리스트라서 안 된다고 했던가. 밴드 얘기 더 듣고 싶었어요. 음악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멋져 보였거든요. 난 항상 마지막 문장을 쓰는 걸 힘들어 하나 봐요. 당신 이름 참 달콤하죠. 폭풍의 언덕과 초콜릿이라. 안녕, 히스클리프. 먼 훗날에 다시 만나요.
To. 라이어스
참 많은 이야기를 당신하고 나눈 것 같은데 아직도 못 다한 이야기가 있는 기분이에요. 언제나 말했지만 당신 참 벽 같은 남자예요. 흔들림없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언제 무너질까 보고 있을 때마다 조금 위태롭기도 한. 물론 이 말 들으면 또 나는 무너지지 않는다, 라고 무뚝뚝하게 대답하겠죠. 그런데 그거 알아요? 당신 말은 엄청 무뚝뚝하게 하면서 실상은 다정하기 짝이 없어요. 그렇게 남 걱정해주면서 담담하게 구는 걸 보면 어떤 면에서는 귀여워요. 제가 처음에 당신이 코라올리너스 장군 같다고 했잖아요. 여전히 그 생각은 변함없는데, 당신은 그보다는 좀 더 귀여운 것 같아요.
그러고보면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나는 당신한테 거의 전부를 얘기해주고도 당신 얘기를 듣지를 못했네요. 그건 천성인가요? 자신에 대해 비밀이 많은 것 말예요. 물론 말하고 싶지 않다면 더 물을 생각도 없기는 했어요. 내가 떠났다고 울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 무척 다행이네요. 그리고 운 없는 거 말인데요, 행운은 좋은 편인 내가 당신한테도 나눠 드릴테니 어떻게든 잘 나올 수 있을 거예요. 뒤 돌아보지 않을 사람인 걸 알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서 다시 말할게요. 당신 말대로 나는 스쳐지나가는 찰나의 사람이었고, 당신은 여전히 잃을 게 없을 거예요. 나를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다정한 사람들은 말해주지만 사실 아주 많다는 걸 나도 알고 있어요. 비록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바보는 아니랍니다. 이런 말 굳이 늘어놓지 않아도 잘 할 사람인 거 알아요. 안녕, 라이어스. 끝에야 이름으로 부르네요. 당신이 말한대로 먼 훗날에 다시 만나요, 바이트.
To. 롤리타
아, 롤리타. 벌써 당신에게까지 편지를 쓰게 되는 군요. 당신이 너무 걱정 돼서 잠에 들 수가 없었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내 향수를 당신 손목에 뿌려주지 말 걸 그랬나봐요. 사랑스러운 롤리타, 당신에게 가장 먼저 해주고 싶은 말은 절대로 당신이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야기였어요. 치마를 입고 머리를 기르고,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아해도 롤리타가 정말로 롤리타로 있고 싶다면 나에게는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걸요. 아무도 당신을 이상하다고 할 수는 없어요. 심지어 아직 내가 누구인지 잘 모르는 당신의 친구 돌리마저도 당신에게 이상하다는 말을 해서는 안 돼요.
슬픈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저도 당신이 그립지만, 당신이 아주 먼 훗날에나 저와 다시 만나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내가 어른같다고 했죠? 맞아요. 나는 어른이에요. 그러니까 작별할 때는 울지 않을 게요. 대신 마음 속으로 당신을 조용히 그리워 할게요. 슬퍼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까이 가 위로해주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해도 닿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아서 더 마음이 아파요. 아름다운 님펫. 비록 당신은 당신의 큰 키와 큰 손이 싫다고 했지만 나는 당신의 그 키와 손이 부러웠고, 또 동시에 사랑했음을 알아주세요. 좋아하는 것들을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말해주고 싶었어요. 그리고 내 생일 축하해준 거, 너무 고마워요. 상냥하게 속삭이던 생일 축하 인사 덕에 그 날 생일은 유독 달콤했던 것 같아요. 손목에 남은 내 향수의 향이 지워지거든 천천히 저를 잊어도 괜찮아요. 기억의 방에 저를 가두고 멀리, 멀리로 떠나서 행복해져도 괜찮아요. 다만 방향을 잃지 말아요. 영리한 당신, 내가 없어도 제 길을 찾아갈 수 있을 거예요. 언제나, 곁에 있어요. 완벽한 풀네임을 알았더라면 불러주는 것인데, 마지막까지 롤리타라고 부르게 되어 아쉬워요. 안녕, 나의 사랑스러운 롤리타. 알고 있겠지만 당신을 무척 아끼고, 또 사랑한답니다.
다시는 오지 않으시려나?
다시는 오지 않으시려나?
아니, 아니, 돌아가셨으니
죽음의 침실로 가셨으니
결코 다시 오시지 않는다네.
백설같은 흰 수염 늘어트리고
하얀 백발 나부끼던 분
머리는 아마 같던 분,
이제 영영 가셨으니
한탄한들 다시 오리.
하느님, 불쌍히 여기소서!
그리고 여러분의 영혼에도 축복이 내리시길 하느님께 빌겠어요. 안녕히 계세요.
/ 햄릿 5장 中 오필리어의 노래
증오가 나를 죽이려 하네.
방향성을 잃고 뒤 돌아본 에우리디케,
다시금 끝으로, 끝으로,
발을 헛디뎌 끌려가는 구나.
안녕. 나의 오르페우스.
'Community > 관계로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D의 세계 (0) | 2017.04.25 |
---|---|
愛 (0) | 2016.12.21 |
Doctor's Record 2 (0) | 2016.04.29 |
Doctor's Record 1 (0) | 2016.04.28 |
Graduation (0) | 2016.0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