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 Testament
  • 2021. 5. 29.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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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반 표도르비치 까라마조프는 어린 나이에 자신이 타인에게 쉽게 사랑받을 수 없는 족속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미형의 얼굴을 가지지 못했고 어린 시절부터 아이답지 않게 사특했으며, 영리한 머리를 굴려 보았을 때 이 사특함이 어른들을 소름끼치게 만든다는 것을 알면서도 적당히 어리석게 굴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의 죄를 쉽게 용서하지 않았고 자기 자신에게도 엄격하게 굴었다. 많은 이들이 이반에 대해서 말할 때 그의 지성과 종종 내비치는 시니컬한 유머에 대해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결국 문장 끝에 이런 말들을 덧붙이곤 했다. 동생과는 정말 다른 사람이죠. 사람들은 이반과 알료샤가 친형제라는 사실을 인지할 때마다 우스갯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똑똑한 것 빼고 모든 좋은 것들은 알료샤가 물려받았군. 안 그런가, 이반? 그런 말들을 알료샤는 곤란해 했지만 이반은 퍽 반갑다는 얼굴로 받아들였다. 맞아, 나쁜 피를 물려받기에 알료샤는 너무 고결하거든.

     

    <나쁜 피>

     

    모두가 알렉세이 표도르비치 까라마조프를 알료샤라고 불렀다. 그는 차갑고 가벼운 숨을 가지고 태어난 어린 시절부터 형제인 이반과 달리 누구에게든 사랑받았다. 알료샤는 대단히 영리한 사람은 되지 못했지만 어디에 떨어지든 굶어 죽을 팔자도 되지 않았다. 추위에 떨거나 배를 곯을 상황이 되면 거리의 누구든 알료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신조차도 그를 사랑했고, 짐승처럼 사는 아버지 역시도 그에게는 관대한 구석이 있었다. 알료샤는 모든 이들이 자신에게 호의적이라는 걸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냉소적으로 구는 형제 이반이 저를 대할 때만큼은 친절한 낯으로 변한다는 걸, 고작 얼굴 전부를 가리지도 못할 손으로 제 눈을 가려주느라 자신의 눈을 가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미 인지한 뒤였기 때문이었다. 알료샤는 형제의 친절을 모르는 척했다. 알료샤는 자신이 눈 돌렸던 세상의 모든 더러움 속에 이반의 친절함을 넣어두었다. 그는 공평한 이였으므로, 이 세상에서 누구도 노골적으로 증오하지 않는 대신에 누구도 진심으로 사랑해 본 적이 없었다. 이 세상에 남은, 가장 가까운 핏줄 이반 역시도 알료샤의 예외가 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알료샤는 언제나 모든 사람의 예외로 군림하며 선량한 얼굴로 이렇게 속삭였다. , 신이 우리 모두를 구원할 거야. 언젠가 이반을 추종하는 하인 하나가 알료샤에게 반문했다. 수도복을 입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의심에서 자유롭다는 건 어쩐지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괜찮아요. 나약하다는 건 아직 사랑할 수 있다는 거니까. 그러나 알료샤는 나약해 본 적이 없었다. 그 누구도 사랑해 본 적 없었기 때문이었다.

    단 한 번도 뚜렷한 악의를 가져본 적 없는 삶은 얼마나 고결한가. 열렬한 호의를 느껴본 적 없으니 알료샤는 악함과는 언제나 거리가 멀었다. 그는 약혼녀 카체리나를 두고 그루첸카와 사랑에 빠진 드미트리를 이해하지 못했고 아들의 여자를 욕심내는 아버지 역시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개중에서도 그루첸카를 가장 이해하지 못했는데, 사랑이라는 고결한 이름으로 어떻게 부자 사이를 저토록 이간질해 놓을 수 있냐는 것이 그가 그루첸카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단편적인 감상이었다. 그러나 알료샤는 그루첸카를 미워하지는 않았다. 아버지 표도르를 미워하지 않는 것처럼, 또는 하인 스메르쟈코프를 두려워하면서도 완벽하게 멸시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알료샤가 이해하지 못하는 족속 중에는 친형제인 이반 역시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건 이반이 드미트리의 약혼자인 카체리나에게 애정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료샤의 입장에서 보자면 드미트리가 이반을 향해 비아냥거리며 쏘아댄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너는 네가 우리 중에서 가장 고결한 줄 알지. 너에게도 더러운 까라마조프 가의 피가 흐르고 있어.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가족들이 서로가 가지지 못한 것들만 탐하려고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이반은 알료샤가 느끼기에 가족들 중에서도 가장 열등감이 심한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종교에 대해 냉담하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알료샤는 남을 사랑하는 일에 대해서는 무지했지만 누구보다 남을 동정하는 일에는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다른 모두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반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난 무슨 일이 있어도 형을 믿어. 언제나 형의 곁에 내가 함께 할 거야. 이반은 그 말에 한쪽 입꼬리만 올린 채로 대답했다. 하지만 넌 이제 수도원으로 들어갈 테지. 그런데 네가 날 구원하겠다는 거야? 난 아직 제대로 파멸하지도…….

     

    <우리가 죽어버렸으니까>

     

    알료샤는 이반이 무너졌을 때 어느 정도는 슬펐고 또 어느 한 편으로는 기뻤다. 언제나 벽처럼 제게 등을 보이고 서 있던 형제가 제 품 안에서 무너져 우는 것을 보는 게 알료샤로 하여금 살아있는 것 같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너도 절대로 피할 수 없어. 알료샤는 언젠가 들었던 저주에 가까운 목소리를 회상했다. 옳은 말이었다. 까라마조프 가 사람들은 언젠가 기필코 살인을 하게 될 운명을 타고났다. 남을 무너트리고 타인의 삶을 망가트릴 때 비로소 살아있음을 체감하는 족속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 나쁜 피로 결실을 맺어야만 했다. 스메르쟈코프는 죽어버렸고 드미트리는 한동안 돌아오지 못할 것이며, 카체리나는 결국 이반과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 이반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버지의 유산이 이반에게 상속되기는 할 테지만, 이미 어느 정도 정신을 놓아 버린 이반이 그 유산을 제대로 지킬 수 있을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알료샤는 이반을 동정했다. 알료샤의 희미한 기억 속에는 자신보다 한 뼘은 더 큰 딱딱하고 음울한 얼굴의 형제가 벽처럼 그를 등지고 서 있었으나 이제 알료샤는 무너진 이반을 두 팔을 뻗어 끌어안아 줄 수 있게 되었다. 신의 세계에서는 신의 말이 곧 섭리지만 인간의 세상에서는 대심문관의 말이 곧 법이다. 대심문관이 옳았다. 우리는 너의 존재를 빌어 우리의 존재를 번성시켜 왔다. 알료샤는 어린아이처럼 우는 이반을 품에 안고 그의 뒷머리를 한참 동안 쓰다듬어 주며 신의 이름을 빌어 무너진 형제를 위로했다. 괜찮아. 이제는 내가 형을 구원해 줄 수 있잖아. 형이 완전히 파멸해 버렸으니까. 속닥거리는 목소리는 가늘고 부드러운 미성인 탓에 꼭 예수의 잉태를 알리는 천사 가브리엘의 목소리처럼 들렸지만 냉담자 이반은 사랑하는 동생 알료샤의 속닥거림에도 흔들리지 않고 비웃음만 흘렸다. 하지만 넌 이제 나를 이렇게 두고 떠날 테지. 수도원으로, 사람들 사이로, 옳은 것을 쫓아서…… 그러다가 나보다 먼저 죽어버릴 거야. 알료샤는 비웃는 입매를 타고 흘러내리는 이반의 눈물을 손등으로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이반이 그제야 고개를 들어 알료샤와 시선을 맞춰주었다. 알료샤는 언젠가 아버지와의 작별 인사 속에서 그랬듯이 이반의 뺨과 입술에 세례하는 것처럼 입을 맞춰주고는 무너진 이반을 둔 채로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미성이었고 돌아서는 뒷모습은 지나치게 고결한 탓에 인간의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반은 제가 전부 받아야 했던 나쁜 피가 어떤 식으로 결실을 맺는지 목격했다. 가지 마, 알료샤. 이반이 애원했지만 알료샤는 이반을 돌아보지 않았다. 알료샤가 떠난 뒤에도 이반은 오랫동안 알료샤를 흉내내는 목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신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기 때문에 반역자가 생겼다고 말했던 건 형이잖아.

     

    알렉세이 표도르비치 까라마조프가 처형당했다. 교수형이었다. 차르를 시해하려 들었다는 명목과 반란의 가담자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조시마 장로가 죽은 지 오랜 시간이 지난 수도원은 이 시기 러시아 어느 곳과 매한가지로 타락해 있어 알렉세이의 결백이나 그의 고결함을 증명해주지 않았다. 한때 동료였던 자들이 모두 그에게서 등을 돌렸고 알렉세이는 유언을 말하라는 차르의 명령에도 한참 동안 침묵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곤 죽어버린 것이다: 사랑해요.

    그러나 알료샤는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없는 인간이었으므로 알렉세이가 뱉은 저 말은 대단히 거짓된 종류의 감언이설이었다. , 그의 아버지 역시도 입을 열 때마다 혀에서 뱀이 기어 나오는 어릿광대에 불과하지 않았던가. 알렉세이 표도르비치 까라마조프의 죽음은 며칠이 걸려 형제 이반에게 전달되었다. 그 시기의 그는 나이가 들고 몸이 쇠약해져 요양이라는 명목으로 칩거한 채 유산을 하잘 것 없는 지성적 사치를 위해 탕진하고 있었다. 그는 대부분의 문인들이 가난해지고 마는 러시아의 이치에 따라 궁핍해졌고, 언젠가 과외를 구하고 신문에 집필한 사설을 값싼 돈에 팔아치웠을 적처럼 근근이 자신의 생각과 독한 보드카를 같은 값으로 교환했다. 아무도 그의 곁에 남지 않았다. 문을 열어 두어도 문지방을 넘어 그를 찾아오는 이가 한 명 없었다. 인간의 꼴을 한 것은 대체로 전부 그의 상상이거나 어떤 커다란 악의였다. 그러니 이반은 제 친동생이 교수형 당했다는 말을 전하러 온 근위병에게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 근위병이 어서 알료샤의 얼굴로 바뀌길 바라며 한참을 아무 말 없이 기다렸을 뿐이었다. 그러나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근위병은 어느 날 알료샤가 이반을 등지고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떠났던 몇 번의 순간들처럼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은 채 떠나갔다. 이반은 그날 밤, 자신을 신처럼 따랐던 하인의 생모가 그랬던 것처럼, 또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오필리어가 그런 것처럼 맨발로 저택을 뛰쳐나와 강물을 향해 내달렸다. 인간의 세계에서는 언제나 대심문관의 말이 옳았다. 신은 그를 한 번도 구원해 준 적 없었다. 고결한 자들은 언제나 천박하게 태어나 고결한 척 살고자 했던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법이므로. 이반은 발에서 피를 질질 흘리고 머리가 산발이 된 채로 흰 와이셔츠에 시곗줄은 달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꼴로 강물에 몸을 던졌다. 오필리어의 죽음만큼 아름다운 마지막은 아니었지만 하루가 지나고 강물에서 익사체를 건져 올렸을 때 사람들은 물에 빠져 죽은 사람 꼴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멀쩡한 이반의 시신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네가 믿는 종교에서 성인들의 시신은 썩지 않는다고 가르친다며…… 그럼 이건 어떻게 설명할 거야? 대답해 봐, 알료샤. 대답해 보라고. 그러나 두 사람 다 죽어버렸으므로 이반의 유언에 대한 대답은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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