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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당파와 총리파의 긴 정치 싸움이 끝나고 승리는 후자의 것으로 돌아갔다. 총리의 여동생이자 한 나라의 왕비였던 욕심 많은 여자는 폐위되어 외국으로 망명을 떠났고 왕가의 유일한 후계였던 어린 왕은 어떤 방식으로 입수했는지 모를 장식용 권총으로 자살했다. 세간은 몇 달 내내 그들의 이야기로 떠들썩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모든 일이 없었던 일처럼 잠잠해졌다. 확 끌어 올랐다가 차게 식어 버리는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장홍현은 어렵지 않게 위신 있는 총리 자리를 꿰찼다. 사람들은 야망을 겉으로 표출하지 않는 젊은 총리에게 꽤 쉽게 믿음을 가졌다. 저 사람 참 청렴하고 사랑도 안 할 것 같고 아무튼 참! 믿음이 가!

 

<보좌관 A의 좌충우돌 총리 옆 생존기>

 

총리 보좌관으로 발탁된 A는 약간의 망상벽이 있는 것을 제외하면 잘 짜인 엘리트 코스를 일탈 한 번 없이 단계적으로 밟아 올라온 정치 유망주였다. 부모님이 모두 정계 인사 출신이었던 데다가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알 법한 수도권 4년제 국립대의 정치외교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A는 정계 인사들이 너도나도 써준 추천서를 품에 한아름 안고 장홍현의 사무실에 첫발을 디뎠다. 꼭 권력이나 연줄 때문이 아니더라도 개인적으로 젊은 총리를 어린 시절부터 존경해 왔던 A에게 총리 보좌관의 자리는 아주 특별한 것이었다. 열의가 넘치는 신입 보좌관은 제게 딱히 관심이 없는 총리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정글 같은 국회에 적응해 나가기 시작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번쩍 차리면 목숨 하나는 부지한다고, 총리 장홍현은 그다지 위협적이거나 까다로운 상사가 아니었으므로 보좌관 A는 생각보다 자신이 이 고상한 난장판에서 잘 버티고 있다고 생각했다. 장홍현의 사무실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도현진에게 의구심을 품기 전까지는.

 

홍현의 비서실장은 일은 나름대로 잘하지만 집안 좋고 학벌 괜찮은 것 빼고는 조금 어리버리한 홍현의 새 보좌관에게 구명줄이라도 던져 주려고 했던 모양인지 몇 번 주의를 주었다. 사무실에 가끔 그 집안 막내 아들이 들려서 갉작거리고 갈 텐데 총리님이 허락한 거니까 제지하지 마세요. A는 도현진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지 못해도 도현진이 속한 집안에 대해서는 대충 건너 들어 알고 있었다. 화서 출신이라고 했으니 총리의 사람들일 것이고 그렇다면 사무실 문지방이 다 닳도록 방문을 이어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A가 느끼기에 다른 화서 출신 사람들과 현진을 대하는 총리의 태도는 어렴풋이 다른 구석이 있었다. 딱 집어 이거다! 라고 말하기는 어려웠으나 A는 총리의 사무실 의자에 아무렇지 않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현진을 마주할 때마다 어디 흔한 스캔들 한 번 터지지 않는 총리와 현진의 관계에 의심을 더해 갈 수밖에 없었다. 홍현의 비서실장이 그런 A를 보면서 호기심이 보좌관을 죽인다며 괜한 생각 하지 말라고 충고 아닌 충고를 계속해서 주었지만 이미 시동이 걸린 A의 창의력과 망상벽은 출발한 롤러코스터처럼 멈출 수가 없었다. 원래 소방차는 빨간 불에 멈추지 않는 게 국룰이지 않던가. 결국 홍현이 보좌관인 자신을 물리고 사무실에 현진과 단둘이 남아 대화를 하겠다고 전했을 때 A는 떨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혹시? 설마? 정말? 하며 결재 서류 이면지에 자신이 생각하는 상대적 진실들을 끄적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우리 총리님은젊은 남자 애인이 있는 것 같다. 세상에나 마상에나.

 

<아이 참 들켰네 하지만 한 번만 들어보세요>

 

결재 서류 뒷면에 끄적이던 A의 총리 관련 망상은 점점 그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보좌관이라는 직함은 바쁠 때는 미친 듯이 바빴지만 아닐 때는 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한가했다. 게다가 A의 상사인 홍현은 무슨 기계 인간이라도 되는 것처럼 미루지 않고 일을 착착 처리해 A에게까지 떨어지는 추가 업무는 많지 않았다. 점점 더 총리에 대한 존경심이 커질수록 A의 망상벽은 존경심에 비례해서 같이 커졌다. 우리 총리님이 저렇게 대단하신데 애인이우리 총리님이 이렇게 잘생기셨는데 사무실에는 애인이어김없이 주에 며칠 단위로 홍현을 찾아오는 현진을 사무실 안쪽으로 안내하면서 A는 홍현과 현진에 대한 관찰 일기 를 빙자한 망상글 를 조금씩 작성하기 시작했다. 오후 523, 오늘도 그분이 방문했다. 다과를 내어 드리고 기다리고 있으니 총리님이 업무 중간에 나오셔서 왜 벌써 왔냐고 묻는 진풍경을 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식사할 수 있을 만한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총리님은 보기보다 다정공이신 것 같다……. 이하 생략.

 

보좌관 A의 운명의 날은 지난 망상의 업보와 함께 찾아왔다. 입사한 지 몇 개월이 지나면서 슬슬 정신머리가 나가기 시작한 A는 생각보다 널널한 업무 환경과 관대한 상사에 국회가 호랑이 굴이라는 사실을 잊기 시작했다. 이거 참, 생각보다 국회 별 거 없는데? 라고 생각한 지 이틀 만에 A는 자신이 쓰던 홍현진 관찰 일지를 결재 서류 파일에 끼워 홍현의 책상에 올려 두었다는 무서운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새로 일지를 작성하려고 보니 그 일지가 업무 서류와 바꿔치기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자신이 평소 들키지 않게 결재 요청 서류 파일에 일지를 끼우고 다닌 것이 화근이었다고 A는 스스로의 멍청한 철두철미함을 탓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은 수습할 수 없었다. A가 허겁지겁 출근했을 때는 이미 비서실장을 비롯해 총리까지 업무를 보고 있는 상태였다. ! 빌어먹게 성실한 나랏님! 국회 아이돌은 역시 출근 시간도 다르다 이건가? 스스로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음을 온몸으로 깨닫고 A가 도박 묵시룩 카이지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동안 장홍현은 결재 서류인 척 들어와 있는 자신과 현진에 대한 관찰 일지를 꼼꼼하게 읽어 보고 있었다. 애인인 것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았음에도 보수적인 정계 인사들 중에 현진과 자신을 그렇고 그런 눈으로 보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던 터라 홍현의 입장에서는 보좌관 A가 꽤 흥미로웠다. 레스토랑 예약 한 번만 더 시켰다간 호텔 예약까지 미리 잡아 놓을 보좌관이라니. 자기 상사를 다정공이라고 적어 놓을 만큼의 대담함이 있는 보좌관이라니. 홍현은 드물게 조금 입매를 끌어 올려 웃고는 서류 파일을 덮어 다시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딱 저기까지만 문제가 불거졌다면 A는 한동안 상사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는 못했을지언정 울며 사표를 낼 필요까지는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든 홍현이 업무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증거 인멸을 하려고 했던 A의 계획은 총리를 오전부터 방문한 현진 때문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사무실에서 나오며 A를 형형하게 노려보고 가는 현진 앞에서 범 앞의 강아지 그 앞의 햄스터가 되어 발발 떨던 A는 곧장 총리 앞으로 호출당했다. 외출을 위해 겉옷을 입고 있던 홍현이 A에게 결재 서류 파일 안에 있던 관찰 일지를 돌려주며 그 웃고 있지만 묘한 표정으로 책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아닌가? A는 너무나 아찔해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스스로 혀를 깨물 뻔했다. A의 뒤에 있던 비서실장이 몰래 혀를 찼다. 저놈도 얼마 못 버티고 사표 써서 오겠군. 비서실장은 A의 관찰 일지를 읽고 다른 부분이 아니라 홍현을 가지고 망상했다는 사실에 화를 내던 현진을 떠올리고는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유교 보이 비서실장이 느끼기에 이번 국회는 아주 성실하고, 또 틀려먹은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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